약속Where Beings Be

루시에서부터 경종, 소우주, 미명. 그리고 우리/ 최재은 작가

최재은 작가는 관람객에게 물음표보다는 느낌표를 전하는 작가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은 작가의 주요 작업을 비롯한 신작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의 작품 활동은 1975년 일본 소게츠 아트센터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작가는 이 시기를 “위대한 문명을 발견한 순간과도 같았다”라고 회상한다.

2001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자연은 최재은 작가의 화업을 관통하는 주제다. 이번 전시에서는 ‘루시’, ‘경종(警鐘)’, ‘소우주’, ‘미명(微名)’, ‘자연국가’라는 5개의 소주제를 통해 작가가 시적으로 표현한 자연과 생명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약 320만 년 전의 화석, 백화한 산호, 높아지는 해수면, 일상에서 마주한 들꽃과 들풀 등을 통해 인류의 기원부터 현재 사회가 맞닥뜨린 생태 위기까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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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기는 것은 3m 높이의 설치 작품 ‘루시’. 〈루시(Lucy)〉를 마주하며 인류의 기원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약 320만 년 전의 화석으로, 당시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었던 루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작가는 이 화석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골반 형태에 주목해 히말라야산 한백옥돌을 육각형 기반의 허니컴 모양으로 절단하여, 세포의 완전한 형태로 여겨지는 육각형 조각들을 결합해 네 개의 뼈대 형상을 이루는 역삼각형 구조를 지층처럼 쌓아 올렸다. 〈루시〉를 둘러싼 자작나무 구조의 거대한 거처는 대자연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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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빛의 루시를 지나고 들어서게 되는 ‘경종(警鐘)’ 섹션은 직전 공간과 대비되는 암흑이 펼쳐진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 위로 높아지는 해수면 온도가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리얼타임 영상이 상영되고, 중앙에 위치한 백화한 산호가 희미하게 빛을 밝힌다. 오키나와 해수의 이상고온으로 화려한 빛깔을 잃고 하얗게 탈색돼 뼈대만 남은 산호들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와 앞으로 닥쳐올 예측 불가능한 자연환경의 심각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경종

〈대답 없는 지평Ⅰ(Horizon of the Unanswered Ⅰ)〉은 검은 바다의 이미지 위로 지구 여러 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리얼타임’ 영상 작업이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데이터와 칠흑빛 바다가 병치되어, 수치화된 현실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그 심각성을 알리고 있음에도 어둠 속에서 외면받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어 제시되는 〈대답 없는 지평 Ⅱ(Horizon of the Unanswered Ⅱ)〉, 〈대답 없는 지평 Ⅲ(Horizon of the Unanswered Ⅲ)〉는 오키나와 해수의 이상고온으로 백화된 산호로 참혹한 생태계 파괴 순간을 가시화하며, 자연이 보내는 경고로 작동한다. 동시에 생명을 잃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순백의 아름다움은 침묵 속에도 빛나는 상실의 미학을 보여준다.



들풀, 들꽃을 압화 한 작업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320만 년 전, 멸종된 들꽃의 목소리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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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삼백만 년 전부터 지구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들풀과 들꽃도 전시장 한편을 차지한다. 일본 교토 인근에서 만난 560종 식물을 압화해 각자의 이름과 쓰임새, 역사를 소개한다. 식물의 주권을 찾아주자는 명목 하에 조성된 이 공간은 ‘미명’이라 이름 붙였다.

‘미명(微名)’은 작고 미미한 존재들까지도 세상을 이루는 고유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장영규 음악감독과 협업한 멸종된 식물 종의 이름을 부르는 ‘이름 부르기(To Cal by Name)’ 산업혁명 이후에 멸종된 대표적 종의 이름을 부르는 음향 설치 작업이다. 숨결이 깃든 목소리로 불려지는 다소 생경한 여러 이름은 차가운 표본을 살아있는 존재로 일깨우고 다시금 이름을 얻고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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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우주

‘소우주’에서 작가의 시선은 대지의 안팎에 존재하는 미시 세계로 향한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World Underground Project)〉에 사용된 와시(washi)는 간피(樹皮), 고조(楮), 아사(麻)를 배합해 제작한 종이로, 1986년 경주 토함산 자락에서 시작해 일본,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의 토양에 묻어 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지상으로 꺼내어 공기와 접촉하며 형성된 문양(드로잉)을 고착시키는 방식의 작업이다. 흙은 오랜 시간 축적된 자연과 문화의 흔적을 겹겹의 지층 속에 품고 있었고, 종이는 그 심연의 시간들을 자신의 몸에 새겨 돌아왔다.


루시에서 시작하며 우리에게 각성의 경종을 울리고 이름 없는 것들을 기억하며 이름을 부르게 하고. 흙이 그린 그림을 통해 심연의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루시’가 살고 있다.

인류의 기원을 더듬어 가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모두 진화해 왔지.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은 늘 질문을 던지지만 우리는 늘 외면하며 살아간다. 못 들은 척, 안 들은 척,

대답 없는 것들을 위하여 끝내 사라져 가면서도 자연은 질문을 남겨놓는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땅의 모습이 변해가는 것을 알면서도 땅의 목소리를 외면한다.

들풀, 들꽃, 보도블록 틈바구니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것들을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사라지게 한다.

지구에 꽃이 출현한 시기가 언제일까? 꽃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지만 우리가 아는 범위 한에서만 꽃으로 인식한다.

꽃병에서 꽃의 목이 아래로 꺾일 때 마음이 좋지 않다. 그래서인지 꽃을 사는 일이 드물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꽃들이 시들면 거꾸로 매달아 걸어둔다. 아래로 향한 장미의 색은 더 짙어진다. 만지면 부서질듯한 바스락 거림... 이미 죽은 꽃을 두 번 죽이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마른 꽃을 볼 때마다 수없이 기억하고 생각하고 떠올린다는 점 때문에.....

마른 꽃이 있는 방. 고요하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륙의 한 부분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다면

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어느 곶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고,

그대의 친구 혹은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니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린다.

존 던의 시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륙의 한 부분이라.

....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린다.

누군가의 소멸은 나의 소멸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된 존재이기에.... 아름다운 그녀의 작업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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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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