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손턴 와일더
손턴 와일더의 첫 번째 퓰리처상 수상작 장편소설. 어느 날 찾아온 예상치 못한 비극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특히, 설명할 수 없는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왜 하필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 모든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손턴 와일더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18세기 초,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인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그 다리를 건너던 다섯 명의 여행자가 목숨을 잃는다. 이 비극적인 사고를 목격한 프란치스코회 주니퍼 수사는 희생자들의 삶을 조사하며, 이들의 죽음이 신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었는지를 밝히려 한다. 소설은 그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삶의 의미와 사랑, 예술, 그리고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목차>
어쩌면 우연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에스테반
피오 아저씨
어쩌면 신의 의도
’ 우연인가 의도인가?‘ 세상의 비극들은 허망한 우연의 산물인가. 초월자의 의도가 실현된 결과인가. 이 질문을 구약의 욥이 물었꼬.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소식을 들은 여섯 살 괴테도 물었으며....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도 물었다. 어쩐지 울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
주니퍼 수사는 사망자 중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모두 있었는데 악한 사람에게는 파멸이 닥친 것이고 선한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일찍 부름을 받은 것이니 신의 의도는 있었을 뿐 아니라 정당하다는 것...
주니퍼 수사가 쓴 책은 사고 희생자들을 다루며 수천 건의 일화와 증언을 나열한 뒤, 하느님이 당신의 지혜를 입증하기 위해 왜 하필 그날 그 사람들을 선택했는지를 서술하는 위엄 있는 구절로 결론 맺는다.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니퍼 수사는 도냐 마리아가 살면서 가장 간절하게 몰두한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피오 아저씨에 대해서도, 에스테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나(주니퍼수사) 조차도 샘 속에 숨겨진 더 깊은 샘을 놓쳤을 수 있다.
재난과 참사 앞에서 나는 ‘신을 용서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려면 어떤 이야기를 읽어야 할지 고민한다. 이 소설이 제시하는 답은 놀랄 만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이 원하는 답은 놀랄 만한 답이 아니라 당신은 따라 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답이다. 지난 백 년 동안 가족과 친구를 잃은 많은 이들이 제 고통을 이해하고 또 계속 살아가기 위해 이 책에 매달렸으리라.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 비극적인 부분일수록 더. - 신형철 (문학평론가)
<책 속에서>
1. 어쩌면 우연
첫 문장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 이 다리는 리마와 쿠스코를 잇는 큰길에 놓여있었고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건넜다. 사람들은 리마에 방문한 지인을 이끌고 와서 백 년도 더 전에 잉카인들이 고리버들을 엮어 만든 이 다리를 구경시키곤 했다. 성왕 루이 9세의 이름과 흙으로 지은 건너편 작은 성당이 그 다리를 보호해 준다고 여겼다.
P. 14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심 안도하며 “십 분만 늦었다면 나도…”라고 혼잣말을 했겠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우주에 어떤 계획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삶 속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주니퍼 수사는 그 순간 대기를 가르고 떨어진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겠다고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떠난 이유를 밝혀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6년 동안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고 리마에 있는 집이란 집은 찾아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 십여 권의 공책이 다섯 사람의 삶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온전했다는 것을 입증하려 애썼다.
그 책은 사고 희생자들을 다루며 수천 건의 일화와 증언을 나열한 뒤, 하느님이 당신의 지혜를 입증하기 위해 왜 하필 그날 그 사람들을 선택했는지를 서술하는 위엄 있는 구절로 결론 맺는다.
P. 19 어떤 이들은 우리는 절대 모를 거라고, 신에게 우리는 여름날 사내아이들이 죽이는 파리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쓸어내지 않는 한, 참새의 깃털 하나도 그냥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2. 몬테마요르후작 부인
그녀는 결국 자신이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목상의 딸, 말을 더듬도 못생긴 그녀가 거만한 태도의 몰락한 귀족과 결혼하여
냉정하고 이지적이며 예쁜 딸 클라라를 낳아 온 사람을 퍼부었지만 딸은 엄마를 혐오하였다.
스페인으로 떠나는 도냐 클라라. 딸이 떠난 뒤 도냐 마리아는 내면 속으로 더 침 참하고 딸에게 주기적으로 보낸 편지는 그녀 사후 불후의 명작으로 남음
P 30~31 그녀는 보석 반지를 낀 손으로 종잇장을 넘기면서, 거의 재미 삼아 자주 자문하곤 했다. 혹시 끝없이 느껴지는 이 고통이 아예 심장에 자리를 잡은 건 아닌지. 솜씨 좋은 의사라면 부서진 왕좌 같은 심장을 절개하다가 마침내 어떤 흔적을 발견하지 않을까.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계단식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이 여인은 그동안 몹시 고통받았고, 그 고통이 심장에 자국을 남겼습니다.”
모든 아담의 아들과 딸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생각하며
자신도 죄인이라 생각하곤 했다. 딸에 대한 자신의 사랑 또한 폭압적인 면이 있었기에...
결국 자신이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 50
딸과 나.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문 하나뿐이었고, 우리는 문을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던 거예요...
마리아 델 필라르 손에서 자란 페피타는 후작 부인의 말벗이 되었다.
마리아 델 필라스 수녀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달에 닿을 만큼 높은 산을 쌓겠다며 수천 년에 한 번 밀알을 옮기는 우화 속 제비를 닮았다.
p61
도냐 클라라의 임신 소식에 도냐 마리아는
“다 잘 될까요? 자애로우신 어머니.
종일 기도와 탄원에 매달리다가 돌연 환멸에 휩싸이곤 했다. 자연은 귀머거리고 신은 무심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섭리를 바꿀 수 없다.
P. 64 딸의 편지는 비록 표현은 그럴싸했으나 상처를 주는 말들로 가득했다. 어쩌면 순전히 고통을 주기 위해 교묘하게 기교를 부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문구 하나하나가 후작 부인의 눈으로 들어가서 이해와 용서로 조심스럽게 포장된 다음 가슴에 스며들었다. 마침내 그녀는 일어나, 동정하는 듯한 라마들을 부드럽게 쫓아내고 진지한 얼굴로 성지로 돌아갔다.
P73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냐. 내가 그렇게 된 건 다 환경 탓이야, 내가 양육된 방식이 문제여였어. 내일부터는 새 인생을 살 거야. 두고 보렴 내 딸아.”
마침내 탁자를 치우고 앉아 본인이 ‘첫 번째 편지’라고 칭한 편지를 썼다.
처음으로 용기 내어 쓴 편지였다.
그녀가 편지를 다 쓴 것은 동틀 무렵이었다. 발코니문을 열어 안데스 산맥 위에 반짝이는 많은 별을 보았다. 촛불을 들고 가 잠든 페피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도 사는 것 같이 살 거야. 다시 시작할 거야."
이틀 뒤 그들은 다시 리마를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는 도중 사고가 그들을 덮쳤다
3. 에스테반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산타 마리아 로사 데 라스 로사스 수녀원 문 앞에 쌍둥이 형제가 누워있는 바구니가 발견되었다. 쌍둥이 형제의 보호자는 수녀원장이었다. 에스테반과 마누엘
마누엘의 여인(배우 카밀라 페리촐라)에 대한 사랑
P. 85 그러나 그의 의지와 상상력이 맥을 못 출 만큼 여자에게 단단히 빠져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사랑과 쾌락을 분리할 수 있는, 단순한 성격의 장점을 잃어버렸다. 이제 쾌락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마누엘은 사랑 때문에 복잡해졌다. 이제 미친 듯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극적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상태에 접어들었다.
에스테반은 지금의 삶이면 족했다. 단순했기에 그의 상상력 속에는 새로운 충성을 위한 공간이 없었다.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P98
“ 나가지 마, 새벽 두 시야, 게다가 비도 온다고, 에스테반 맹세코 다 지난 일이야. 이제 난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잠시 사랑했던 것뿐이야.:”
에스테반은 “난 네 앞길에 방해가 되고 있어.”
“신의 이름을 걸고,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에스테반 어서 돌아와.”
쉿 조각에 부딪쳐 무릎이 찢어진 마누엘은 고통 속에 병자 성세를 받고 죽었다.
마누엘을 잃은 에스테반은 반은 정신이 나간 듯 살았다, 하루는 페리촐라의 분장실 앞에 나타났다가 하루는 수녀원 문 앞을 서성이거나..
수녀원장은 에스테반이 알바라도 선장을 따라가는 게 최선의 대안이라 생각한다.
“떠나기 전 수녀원장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출발하기 전 품삯을 전부 선불로 주세요, 그분께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이 선물은 저 혼자 드리는 게 아니에요...”
.... 떠나려던 생각을 갑자기 번복한 예스테반에게 알바라도 선장은
“ 에스테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네. 최대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아. 시간은 계속 흘러가잖아.”
그들은 리마로 출발했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선장은 물건의 운반을 감독하기 위해 다리 아래 강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다리를 건넜고 다리와 함께 추락했다.
4. 피오아저씨
우리는 놀라운 수준의 훌륭한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와서
우리가 다시 경험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기억한 채 살다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
피오 아저씨는 카스티야 지방 명문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모험가의 여섯 가지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타인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되 자기 얼굴과 이름은 바꾸는 능력, 타고난 말솜씨, 무궁무진한 독창성, 비밀주의,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재능,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부자들을 경멸하여 사기를 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마음까지.... 큰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한 가지 일을 2주 이상 지속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에는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어딘가에 매이거나 오랜 계약에 묶이는 것을 꺼리는 성향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진짜이름은 미카엘라 비예가스였다. 12살에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피오아저씨는 자신이 그녀의 피그말리온 노릇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곡예사 준비 과정을 방불케 하는 운동과 식이요법... 빈정거리는 말로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페리촐라와 피오아저씨. 이 두 사람은 천상계 수준의 연극을 페루에서 일궈내려고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다. 걸작이 목표로 하는 대중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밀라는 페루총독 돈 안드레스 데 리베라의 정부가 되어 서른 살쯤 무대를 떠났고 사교걔에서 자리 잡기까지 5년이 걸렸다.... 피오아저씨는 언덕 위 그녀의 저택에 도착하여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카밀라. 내 안에 있는 어리석은 오만 때문에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에 인색했어. 넌 항상 위대한 예술가였어. 만일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마드리드로 가는 걸 생각해 봐. 도냐 미카엘라라고 불릴 때는 나중에도 있을 거야. 우린 곧 늙을 거야. 곧 죽을 거야.”
“아뇨. 스페인에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 마드리드건 리마건 세상은 다 비슷해요.”
.. 천연두에 걸려 절망에 빠진 페리촐라에게 피오아저씨는 아들 돈 하이메의 스승이 되어주겠다고 말한다. “내가 그 아이에게 펜싱, 라틴어, 음악, 신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칠게.”
“하이메가 아저씨와 가겠다고 하면 정오쯤 여관으로 보내겠어요.”
다음날 의젓한 어린 소년이 여관에 나타났다. 갈아입을 옷이 담긴 작은 보따리, 금화 한 이프.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작은 돌멩이.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출발했지만 피오아저씨는 마차가 소년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소년을 목말 태우고 걸어갔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기끼워졌을 때 하이메는 수치심을 감추려 애썼다.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리에 도착했을 때, 피오 아저씨는 어린 소녀와 함께 여행 중인 한 노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피오아저씨는 다리를 건너고 나면 잠시 앉아서 쉬자로 말했다. 그러나 결국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5. 어쩌면 신의 의도
옛날 다리 대신 세 다리가 세워졌지만 그 사건은 잊히지 않았다.
주니퍼 수사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신념을 드러내기 위해 푸에르토리코에 역병이 들었을 때 희생자 15명, 생존자 15명을 영원의 상(相) 아래서 통계 내었다. 기준은 선량함, 종교적 규율을 지키는 근면, 가족 집단에서의 중요성 등... 그 결과 죽은 사람들이 다섯 배는 더 목숨을 구할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인간의 이성으로 뭔가를 조사할 수 없겠다는 체념이 들었다.
P 193
주니퍼 수사가 이끌어낸 귀납적 결론들은
악한 사람에게 파멸이 닥친 것과 선한 사람이 일찍 천국의 부름을 받은 것을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향한 객관적인 교훈으로 오만함과 부유함이 저주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리마의 교화를 위해 겸손함이 최고로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몬태마요르 후작부인이 탐욕의 괴물도 아니고, 피오아저씨가 방종의 괴물이 아닐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완성된 책은 이단으로 선언되어 저자와 함께 광장에서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독방에 앉아 이미 죽은 다섯 명의 삶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어떤 패턴 같은 것이 자기 삶에 있었는지 찾아보려 했다. 자신의 의도가 신앙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성 프란치스코를 두 번 불러 기도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불길에 몸을 기울여 죽었다.
산 루이스 레이 다리 희생자를 위한 장례 미사
알바라도 선장은 “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행복하단다. 에스테반.”
수녀원장은 “ 페피타. 나의 인생 전체에 저런 특성이 좀 더 있어야 했어, 난 너무 바쁘게만 살았구나.”
수녀원장을 찾아간 카밀라
“수녀원장님, 저는 혼자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저는 그 두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그 사건을 겪고 벌써 1년이 지났네요. 나는 우리 고아원 출신 아이들 두 명을 잃었지만 당신은 친 아들을 잃었다지요?”
“아부이레 백작 부인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키가 크고 다소 피곤해 보이는 미인이 들어왔다. “제 모친이 몬테마요르 후작부인입니다... ”
수녀원장은 그녀에게 페피타와 에스테반에 대해 그리고 카밀라의 방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모두 실패했어요. 그로 인해 한 사람은 벌을 받으려 하고 한 사람은 속죄를 하려 하는군요. 사랑 안에서는 평소에는 감히 이런 말을 입에 잘 담지 않습니다만, 사랑 안에서는 우리의 실수조차 오래가지 않는 것 같더군요”
백작 부인은 수녀원장에게 도냐 마리아의 마지막 편지를 보여주었다.
수녀원장은 편지를 읽고 “ 이제는 나도 알아야 해. 세상 어디서나 은총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삶의 목표로 삼았던 특성들이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
P 206
그날 밤 그녀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사람들, 세상이 너무 버거워 의미조차 희미한 이들, 그러자 침상에 누운 환자들은 자신들이 수녀원장이 지어준 벽 안에 있음을 느꼈다. 벽 안의 모든 건 빛과 따스함이요. 그 바깥은 설령 고통이나 죽음을 면하게 해 준대도 맞바꾸지 않을 암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다른 생각들이 스치고 있었다.
p207
지금 이 순간에도 나 말고 에스테반과 페피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카밀라만이 그녀의 아들과 피오아저씨를 기억하고 오직 이 여인만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참사 앞에 우리는 묻는다. 우연인가 의도인가?
참사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 닥친 불행 앞에서도
답을 찾기 위한 질문을 던져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선하게 살아왔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누가 봐도 악하게 사는 이들은 왜 그렇게 잘 살아가는지요?
답이 없는 질문이다. 주니퍼 수사는 다리 사고로 죽은 5명의 희생자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으려 했고 그것이 신의 의도임을 밝히려 했다. 그러나 결국 불손한 의도. 신의 의도를 의심하는 이단으로 인식되어 책과 함께 불에 타 죽는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처구니없는 대형 참사 속에서도 어떤 이는 살아남고 어떤 이는 죽는다.
우연인지... 그 목숨을 들어 올리는 신의 개입인지 혼란스럽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집어든 이 책을 다 읽고서도 답을 찾지 못해다.
이 책의 목차조차 어쩌면 우연에서 시작하여 어쩌면 신의 의도로 마무리 짓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섭리(그것이 자연의 섭리든, 신의 섭리든) 마땅히 그리될 수밖에 없는 어떤
불가사의한 섭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세상을 떠난 누군가가 남겨진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
오랜 시간이 흐르면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도 죽음을 통해 사라진다. 사람의 죽음은 기억의 죽음이기도 하다.
5명의 희생자는 무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자 했던 이들이다. 도냐 마리아도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고 그녀의 어린 말벗 페피타도 용기를 내어 수녀원장에게 편지를 썼고 에스테반도 알바라도 선장을 따라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고 피오아저씨 또한 그러하였다.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는 일은 기존의 삶과 이별하는 일, 같은 몸을 지녔으나 전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로 채워진 몸이었다. 우연히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다리를 건너는 이들을 신은 내려다보았고
신은 그들을 자신의 섭리대로 들어 올렸다. 몸은 다리 아래로 추락해 물속에 잠겼으나 그들의 영혼은 이미 신의 곁에 있었으리라...
어쩌면 우연과 어쩌면 신의 섭리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의 목숨이란 연약하다... 그럼에도 그 연약한 목숨에ㅡ 기대어 꿈을 꾸고, 희망을 새기고 , 용기를 내며 살고자 한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지 알아차릴 혜안 또한 없기에... 오히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인지도..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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