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하는 소리를 내며 밥그릇이 놓였다. 아내가 깜짝 놀라며 급히 손을 저었다. 그렇게까지 소리가 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짜증이 섞였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 꾸역꾸역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아내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실업자가 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는 동안 외출도 안 하고 집안에만 틀어 박혔으니 말이다.
퇴직하자마자 아버지 상까지 치르면서 2주간은 몹시도 바빴다. 간신히 안정을 찾고 나서도 나는 집에만 틀어 박혀 지냈다. “뭐 하는 사람인데 다들 일하는 이 시간에 돌아다니지?” 하고 나를 깔보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이 두려웠다. “저들은 웃으면서 말을 건네는 것 같아도 분명 비아냥대고 있을 테지”. 최근 들어 부쩍 무기력해진 나는 움츠려질 대로 움츠려졌다. 위축되다 보니 바깥 생활 보다 집에 있는 편이 좋았다. 아내의 감정이 미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하긴 매일 삼시 세 끼를 차려 내야 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하루종일 찰거머리처럼 소파에 붙어 있는 나를 곱게 볼 수는 없으리라.
나는 밥상을 물리자마자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답답하여서 산에 올라 바람이라도 쐬여야 할 것 같았다. 등산화 끈을 조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북한산성 입구까지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워를 넘긴 시각, 도심 외곽으로 가는 버스에는 대여섯 명의 나이 든 승객뿐이었다. 그중 3명은 등산복 차림이었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은 머리가 희끗했는 데 분명 나처럼 할 일 없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앉았고 버스 뒷좌석은 비어 있었다. 본능처럼 뒷좌석을 향해 엉덩이를 붙였다. 불편한 마음도 함께 놓였다. 버스는 도착할 때까지 겨우 한 명의 승객을 더 태웠다.
산은 비어 있었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사람들과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을 합쳐도 얼추 여섯 명. 주말이면 사람들로 바글바글 거렸을 산인데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하긴 평일 오전에 산을 찾을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주말에 산을 찾는 게 보통의 삶 아닌가? 어쩌면 저 사람들도 오늘 아침 아내의 눈치를 피해 이곳에 왔을지도 몰랐다. 그렇게라도 동질감을 느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개를 들고 가슴을 열어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찬 공기가 흉막을 지나 폐포까지 시원하게 도달하였다. 두어 번 더 큰 호흡을 하며 오염된 날숨과 함께 불편한 마음도 배출하였다.
정상인 백운대로 가는 길은 거리가 짧은 대신 경사가 심하였다. 금세 체력이 고갈되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마다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마를 타고 흐르던 땀이 바람에 마를 때쯤 일어나 걷기를 반복하면서 정상에 올랐다. 정상의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며 나의 등정을 축하해 주었다. 사방을 조망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환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용기 내어 야호~ 하고 크게 외쳤다. 후련했다. 한 번 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목울대가 터지도록 외쳤다. “야~호~!” 강렬하고 짜릿했다. 좁은 정상을 비켜서니 조금 너른 공간이 있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여러 생각들이 엉켜진 채로 떠올랐다. 치열하게 살아온 삶 아니었던가? 성공적인 삶이라고는 못하더라도 패배자로 살아온 것은 더욱 아니지 않은가? 그런 내가 어느 순간 움츠려 들더니 이렇게 된 거야. 한없이 자책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래!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사는 거야. 퇴직했다는 거, 실업자인 거 사실인데 뭘 숨기려고 해.감출 게 뭐 있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이 나이 되면 누구나 한 번은 퇴직하는 게 당연한 거야. 떳떳하게 살아왔으니 자신 있게 나를 인정해! 앞으로는 멋있는 퇴직생활을 해 보자!’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음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메아리의 향연은 울려 퍼졌다. 나는 하산을 위해 일어서며 “야~호~!” 하고 한 번 더 외치며 패배감도 함께 담아 보냈다. 지척인 인수봉에는 자일에 몸을 의지한 채 한 무리의 클라이머들이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도전이 부러움을 넘어 아름답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