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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들 Jan 07. 2023

100대 명산에서 자신감을 얻다

자신감 회복이 급선무야!

퇴직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도대체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지루한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가사를 조금씩 도우면서 삼시 세끼를 얻어먹는 데 눈칫밥을 먹지는 않았으나 의욕은 떨어져 갔다. 오랜 조직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나는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부서의 목표가 내려오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실천 방법을 강구하고 애를 썼던 기억은 있으나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실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걱정이 많았던 것도 그런 나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생 후반부를 스스로 결정할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한 발짝도 내디들 수 없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안타까움보다는 화가 더 치밀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내를 나간 김에 서점에 들렀다. 세밑의 서점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신년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 자기 계발 도서를 열심히 뒤적이는 모습이 부러웠다. 수험생들도 많았고, 문학코너와 취미 코너에도 사람들은 넘쳐났다.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여행서적 코너까지 밀려왔다. 생각 없이 집어든 잡지 한편에서 ‘100대 명산’ 도전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꽤나 산을 좋아한다면서도 100대 명산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무료한 삶을 지속하느니 야외 활동으로 답답한 숨통을 틔우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을 검색해 100대 명산 리스트를 다운로드하였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기도 찾아 읽어 보았다. 점점 의욕이 생기면서 새 해 첫 산행지를 고를 때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주말이면 자주 들르던 청계산이 첫 타깃이었다.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청계산의 등산로가 머릿속에 훤하여 달음질하듯 걸었다. 우산을 쓰고 산을 오르는 이는 나밖에 없었다. 우스운 복장으로 정상에 올라 인증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은 관악산이었다. 청계산과는 다르게 깔딱 고개도 여럿 있는 바위산이었다. 사당역 들머리부터 숨이 가빴다. 전날 산행의 후유증이 있었음에도 넘치는 의욕이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 중년의 체력을 과신한 무리한 산행이었으나 정상에 올라 인증하는 재미는 훨씬 컸다. 이렇게 100대 명산 도전기는 충동적이며 졸속으로 시작되었다.

산을 찾는 일은 삶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매주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특정 요일에 정기적으로 하는 일은 계획된 삶의 여운을 다시 몸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산행이 예정된 날은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처럼 여겼다. 비나 눈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수많은 지인들의 경조사도 이날만큼은 예외가 없었다. 투철한 각오와 의지 없이 100개의 산행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 번 미루면 두 번째 미루기는 더 쉬웠다. 미루기는 곧 의지가 꺾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산행 때문에 그 어떤 오해가 생겨도 모두 감내하기로 다짐했다.

도전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지도를 준비했다. 서재 한쪽 벽을 덮는 지도에 다녀온 산행지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산행 횟수가 늘면서 표시되는 점들도 늘어갔다. 30여 개의 산을 다녀온 후에는 지도에 어렴풋이 산맥의 형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매번 횟수가 늘면서 하나라도 더 채워야겠다는 조바심도 생겨났다. 1주일 1 산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꼬박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긴 시간 목적지를 잃지 않고 꾸준한 동력을 얻는 장치로 이만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전국에 산재한 100대 명산을 찾아가는 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기에 주로 안내 산악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서 등산 모임을 검색하여 안내 산악회를 알게 되었다. 안내 산악회는 친목을 위주로 하는 기존의 동네 산악회와는 달랐다. 산행을 위한 전문 서비스업이라고 보면 되겠다. 산행을 위해 모객활동을 하는 한편 버스를 제공해 이동을 돕고, 산행을 가이드하는 게 주 업이다. 그러므로 출발지에서의 시간 준수가 매우 엄격하였다. 카페 회원으로 가입하여 매주 어느 산행이 계획되어 있는지 파악한 후 결정하면 되었다. 낯선 이들 틈에 섞여 가는 산행이지만 나는 홀로 다니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불편한 점은 없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해지나 보다. 산행을 준비하면서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초보일 때는 짐을 하나라도 더 챙기느라 배낭이 무겁기만 했다. 새로운 장비를 마련하려고 애썼으며, 서둘러 가느라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연륜이 늘면서 불필요한 짐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장비에 욕심부리지 않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여유를 가지자 사람도 보이고 풍경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산과 겨뤄 다투지 않고 나를 자연의 일부로 여기면서 조금씩 성숙해졌다. 아마도 두 번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면서 계절에 맞는 철저한 준비와 안전이 산행의 기본임을 터득한 것 같다.

2년 간, 사계절을 두 번 지났다. 100대 명산이란 목표를 두니 강원도 설악에서 제주도 한라산까지, 뭍과 섬을 가리지 않고 전국을 돌게 되었다. 체력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산행의 마지막 100번 째는 광덕산이었다. 마지막 일정에는 산을 좋아하는 지인 몇 명을 동반하였다. 지인들은 연신 100대 명산 완등을 축하하며 대단하다는 칭찬을 하였다. 부러움을 사면서도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하고 의구심을 갖기는 하였지만 자신감만은 충만해 있었다.      

퇴직 후 무기력하게 보낸 몇 개월을 생각하면 나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어렵다는 100대 명산에 겁 없이 도전하여 끈기 있게 실천해온 첫 번째 성공기를 통해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얻은 자심감은 나의 퇴직 이후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직도 자신감이 없다면 100대 명산에 도전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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