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닭곰탕집에서 생긴 일

해장의 신세계

하늘의 푸른 색에 속지 않았다. 내리는 눈을 믿었다. 발길이 절로 움직였다. 간만의 고독한 미식가 모드, 버스에 몸을 싣고 혼자 을지로 4가로 향했다. 뜨끈한 국물이 땡겼다. 한국에서 태어나 수십년, 그 중 상당 기간을 술꾼으로 살다보면 이런 날 고기국물이 간절해지는 건 필연 아니던가.


하동관이나 애성회관 한우곰탕도 좋지만 왠지 닭곰탕 감성이었다. 가까이엔 계단집이 있지만 그런 라이트한 국물보다는 딥하고 헤비한 국물이 끌린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 뿐, 황평집 뿐이다. 이 곳의 닭찜과 무한리필 닭육수에 기억상실의 밤을 보낸 게 몇 번이었던가.


혼자서는 처음이었지만 뭐 어떤가. 여기는 충무로 인쇄골목. 지긋한 아저씨들이 속을 풀러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듯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드는 곳 아니던가. 혼밥의 달인인 나로서는 더욱 아무렇지도 않기도 하고.

당연히 특을 시켰다. 여기 단골의 조언에 힘입어 껍질도 추가로 청했다. 토종닭은 아니지만 어린 닭을 쓰지 않기에 깊고 진한 국물의 맛. 퍽퍽하지 않고 고소한 살코기, 무엇보다 쫄깃하고 탱글한 껍질. 이 정직한 조화가 이 집을 수십년간 유지시킨 비결이라면 비결 아닐까 싶다.


마늘 반 스푼과 다대기 한 스푼 반,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후 눈내리는 날의 행복을 즐기던 참이었다. 혼자 온 아저씨들이 두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몇 숟가락 떴을까. 남자 셋,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5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사장님 여럿.


사업차 만나 이야기를 하고 이른 저녁과 이른 술을 해결하러 들어온듯 했다. 음악은 커녕 TV도 안틀어놓는 곳이니 당연히 대화가 들린다. 이 모임의 리더는 여성분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도한다. 김수현 드라마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서울 억양이다. 주로 건강이 화제다. 자연스럽게 식습관으로 넘어간다.


"내가 사십 전에는 기름진 걸 안먹었어요. 고기도 안먹고 생선도 잘 안먹었어. 그런데 일 때문에 쏘주를 마시다보니까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게 되더라고요"
"맞습니다. 술 마실 때 안주를 꼭 챙겨 먹어야죠. 제 친구 놈이 어릴 때 부터 깡술만 먹더니 마흔 셋에 간경변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요, 우리 애들 아빠는 안주도 안 먹어요. 술이 말술인데도 그래요. 왜 그런가 봤더니 장남이라고 어릴 때 부터 그렇게 챙겨 먹인거야. 그것도 아아주 고단백으로만.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멀쩡해요. 검진해도 뭐 하나 나오는 게 없어."
"거 참 다행이네요. 가만 보면 어릴 때 잘 먹은 사람들이 나이 먹어도 건강해요. 이십대 삼십대 때 잘 먹고 다녀야 나이 먹어도 그게 계속 가더라던 말이죠."
"그래서요, 우리 집은 술 많이 먹은 다음 날 뭐 먹는지 알아요? 스테이크, 스테이크를 구워 먹어요. 아침에 스테이크 한 덩이씩 먹으면 속도 확 풀리고 하루종일 든든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허허허, 아침부터 스테이크라니..."
"대단하시네요. 허허허."


스테이크 해장이라니,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해장법이다. 과연 세상은 넓고 해장법은 많다. 서울을 서울답게 하는 구도심 한복판에서 이렇게 또 하나의 가르침을 얻었다. 과연, 은거 고수의 땅 을지로. 언제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치회와 과메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