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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걷고, 보고, 걷다

어떤 숲이 있다. 이름은 없다. 지도에도 없다. 제주에 올 때 마다 이 숲을 찾는다. 올해 초 제주 빠꼼이 동생에게 소개받아 처음 걸은 후, 말 그대로 반했다. 감탄했다. 겨울과 봄, 여름에 한 번 씩 찾았다. 모든 아름다운 풍경의 집합이 다 그렇듯, 그 때 마다 숲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그 때 마다  또 반했다. 또 감탄했다.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지만 그 어떤 이름도 숲의 아름다움을, 위용을, 도저함을, 따뜻함을, 안락감을, 그리고 그 모든 형용사와 명사들을 감싸안을 수는 없었다.


또 제주에 왔다. 오이지 몹이라는 행사에 참가했다. 2박 3일 일정의 첫날 밤, 지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나는 이 숲의 아름다움을 설파했다. 숲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며 숲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해도 그 기대를 뛰어넘는다고. 당연히 사람들은 위치를 알려 달라고 했다.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름도 없고 지도에도 없으니 알려줄 길이 없다. 사실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이 숲을 아는 사람이 늘어 나는 게 탐탁지 않아서다. <무한도전>이전의 혁오 팬들의 마음이랄까. 그런 거 였다. 취기로 고급정보를 하찮게 발설하기엔 들어간 술이 너무 적었고 흐르는 흥은 너무 약했다.


일정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주 여행. 일행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했다. 맛집이건 여행지건 나에겐 언제나 플랜 D까지는 있다. A는 물론 숲이었다. 다들 주저없이 A를 택했다. 공항에서 차를 빌려 사계리로 향했다. 날이 끝내줬다. 하늘은 파랗다 못해 퍼랬다. 구름은 만년설같았다. 바람이 시원했다. 해와 땅사이에 티끌만한 먼지도 없는 듯했다. 이런 날, 숲은 어떤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숲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40분을 달렸다. 진입로가 나왔다. 지난 세 번과 마찬가지로 내비게이션의 지도는 텅 비워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듯한 이 상태를 신기해했다.


이 숲의 장점은 자연과 인공의 좋은 부분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거다. 수천 수만년에 걸쳐 만들어진 수풀과 흙이 있고 걷기 편한 포장도로가 중간 중간 있다. 요컨데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지만 관광의 대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 투박하되 험하지 않다. 흙과 자갈, 시멘트가 번갈아 발을 자극하니 발의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기억에 담아두고 있는 건 갈림길에서의 방향 선택, 그리고 몇 몇 지형지물 뿐. 숲은 시작부터 표정이 달랐다. 여름의 무성했던 녹색의 비중은 낮아졌다. 가을이니까, 라는 듯 길에는 낙엽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군데 군데 피어있는 억새들은 지금 여기가 제주의 11월이라는 책갈피였다. 상수리나무들이 도토리를 땅에 토해놨고 사약의 원료중 하나였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빨간 열매가 땅에서 솟아 있었다. 당연히, 겨울과 봄과 여름에는 못봤던 모습이다. 숲은 이렇게 또 한 번 새로운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또 반했다. 또 감탄했다.


일행들은 숲에 대한 찬미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처음 숲을 걸었을 때 그러했듯이. "여기 썸타는 여자랑 오면 지인으로 들어와서 연인으로 나가겠네!" "길이 적당히 구불구불하니 계속 새로워!" "형, 여긴 그냥 아트야, 아트!" 숲을 처음 만난 후 나는 경향신문 칼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162038405&code=990100)에 이렇게 썼다.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이곳은 숲계의 엄친아라 할 만하다. 숲이 가져야 할, 가졌으면 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온갖 활엽수와 침엽수들이 울창하디 울창하다. 너르게 이어진 평지를 걷다 보면 완만한 내리막과 오르막이 조화를 이루고 개활지와 조림지가 심심치 않게 어울려 있다. 아무리 걸어도 들리는 건 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내 발소리뿐이다.

혹여 이 정적을 발소리로 깨는 게 미안하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완전한 침묵에 몸을 맡겨도 좋다. 그렇게 쉬엄쉬엄 걷다 보면 너른 억새밭이 펼쳐진다. 좋은 날씨라고 하는 행운을 만나게 된다면 눈 덮인 한라산 백록담이 시선에 들어온다. 정말, 눈물이 난다.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다면 함께 말없이 이 숲을 걷고 싶다. 백마디의 말과 천 잔의 술보다 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문장들은 그들의 느낌표와 같은 것이다. 느낌표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그 때 말들을 쌓아 풀었다. 그 느낌표가 만개한 곳은 위 사진의 풍경이 나왔을 때다. 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니 나무대신 들판이 있었다. 들판 아래 이름모를 오름들과 산방산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오후 4시 반, 햇살이 숨을 죽일 무렵의 탁 트인 세상. 우리는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폰 카메라는 물론이고 미러리스로도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장관을. 그리하여 결국 렌즈가 아닌 눈과 머리에 남겨두고자 이 압도적인 스펙타클과 신비로움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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