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인연 26년
난 중어중문학과를 전공했고, 중간에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졸업 후엔 2년 간 무역회사에 다녔다. 퇴사 후 중국에서 사업을 했고, 거기서 지금의 중국인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았고 지금은 한국에서 중국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중국’으로 점철된 내 인생이 수능 점수로 인해 결정되었다는 것은 참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큰 후회는 없다. 내 행불행을 좌우하게 된 것이 중국이 아니었으며 내 순간순간의 선택에 대한 후회만 있을 뿐이니까.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은 97년 어학연수였다.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어학연수는 꿈도 꿀 수 없었는데 난 그래도 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반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학기 동안 현지 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정해진 돈으로 정해진 시간 동안 미친듯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매일 아르바이트 걱정도 없고, 성적에 대한 압박도 없었으며, 남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유롭게 한 학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경제공항으로 한국 경제는 엉망이라고 했지만 난 일상으로 돌아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럭저럭 복학을 했다. 하지만 사실 내 마음은 그럭저럭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자유로움으로 자리잡힌 중국에서의 생활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을 위해선 그 꿈을 접어두어야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직장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 난 다시 한 번 자유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으니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춤을 추게 되었다. 시작은 학원에 수강을 하기 시작했고, 매일 아침 삼성역 4번 출구를 나서면서 쉬던 한숨을 저녁엔 압구정에 있던 힙합 학원에서 해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파라다이스가 다시 생각이 났다.
그래 중국에서 춤을 추는 거야.
내가 댄서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중국 “인민”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준비는 전혀 없었다. 중국에서 힙합이 어떤 의미인지 그걸로 돈을 벌 수 있을지 따위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사업 자금도 구체적인 사업 계획도 정말 내가 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시작을 했다. 엄마도 항상 하시는 말씀이 ‘가시나, 간도 크지’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심호흡을 해야하는 스케일이다. 무슨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나는 그냥 미쳤다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그냥 내 손에 쥔 돈으로 시작만 할 수 있으면 된다. 당시 어렴풋이 하고 있었던 생각이다. 정말 바보였나보다. 사업을 시작해서 장사가 안 될 날도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못했다. 2002년 여름에 힙합 학원을 개원했고 어렵게 이어가고 있던 와중에 반 년 만에 사스(SARS)가 왔다. 나는 학원을 운영하면서 얼마나 내가 생각없이 이것을 시작했는지 알았기 때문에 나의 실패가 사스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스에 대한 원망도 거의 없었다. 난 그저 중국에 계속 있고 싶었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나 대신 내 상황을 답답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학원을 통해 알게된 현지 댄서들도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따르기는 했지만 그들 눈에도 나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순진해서 착한 건 알겠는데 그게 밥 먹여주냐고요. 학원 연습실을 쓰고 있지만 그들도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의 딱한 사정이 그들 눈에도 여과없이 비춰졌고, 알 수 없는 부채감으로 좀 어색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잡아주는 착한 동생들이 있었다. 경제활동으로 연결 시킬 수 있게 학교 특강이나 공연을 직접 알아봐주는 댄서들이 많았고, 외동으로 자라 온 그들에게 나는 특이하지만 정이 가고 손이 많이 가는 누나가 되어 있었다.
현재 남편과의 만남
중국 사업의 실패를 인정하고서야 한국에서 댄서를 초빙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제 현지화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나도 기본적인 것 정도는 가르칠 수 있게 되었고 현지 댄서들과 나는 한 패거리가 되어 몰려다니게 되었다. 다행이도 나를 속이기 위해 접근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며 모두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돕고 지내왔다.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댄서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 되었으며, 가장 터무니 없는 농담을 하고 누나에게 건방진 아이가 왜 나의 가족으로 되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연애를 4년 정도 하고 결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와 나의 공통점을 알게 되었고, 끌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남편과 힘든 결혼을 이어갈 때는 나도 그 사람도 이렇게 부족한 부분이 같았기에 서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고 결혼을 후회했지만 이제는 그도 나도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생각하고 있다.
실수와 슬픔을 통해 그도 나도 배운 것이 있었고, 10년이라는 나이차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모두 성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딱서니 없는 나를 현실의 냉엄함을 몇 년간의 부부싸움과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아직도 철없는 나이이지만 그래도 정신 차리고 할 일을 찾아서 하는 남편 덕에 그나마 그냥 매일이 살아지고 있다.
어쨌든 시작은 수능점수를 안전빵으로 맞춰서 간 중어중문학과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어떻게 살아도 어려움은 나왔을 것이며 그것을 피하려다 오히려 안 좋은 방향으로 간 것도 있었기에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중국과의 인연도 이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이제 남은 아이의 진학, 국적 결정, 그리고 생계 부분도 중국과 뗄려야 뗄 수가 없다. 잘 지내보자, 중국. 사이좋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