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F <주락이월드>를 보며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순 없는 비루한 실력이지만, 그래도 눈치껏 알아듣고 적당히 이해할 수 있는 얕은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열정적으로 찾아보던 일본 드라마 덕분이다. 일본판 <꽃보다 남자>로 입문하게 된 일드 세계는 새로운 매력의 별천지라 그 안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당시 일본 내에서 흥행한 드라마를 챙겨보며 좋아하는 배우도 생기고 일본 문화만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매일 새로운 일드를 찾아 나섰다. 또래집단 사이에서 오타쿠는 비주류가 되기 쉬운 요소라,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능숙하게 숨기는 기술이 부족한 나는 일드 세계에 빠져버린 내가 쉬이 드러나지 않게 잘 포장해야 했다. 평범(?)하게 다들 좋아하는 동방신기, 신화, god를 좋아해야 무리 안으로 자연스레 섞일 수 있었다.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나의 모난 취향을 무난함으로 덮어두며 홀로 즐기는 은밀한 것이 되어 갔다.
유튜브가 주류인 세상으로 판도가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덕후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어떤 한 분야를 좁고 깊게 파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튜브 세계의 강자로 떠오르기 때문일 테다. <주락이월드> 를 볼 때마다 그 시류를 체감한다. 본업은 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술을 정말 좋아해 성심성의껏 파다 보니 조예가 깊어졌고 이게 본인만의 차별점이 되어 '주류 전문 기자 조승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매주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진정한 술 덕후.
분명 엊그제까지만 해도 무난해야 생존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취향을 명확하고 적확하게 정의하여 디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니. 생존전략으로 무난함을 선택하며 깎여나간 취향을 다시 뾰족하게 다듬어야 한다니. 취향은 경험을 통해 첨예해진다. 그 경험은 자발적이기도, 수동적이기도 하다. 소설을 좋아하는 엄마를 따라 자연스레 책을 즐기게 되었고, 와인을 즐기며 공부하는 선배 덕에 와인이 좋아졌다. 더운 여름날 친구 따라갔던 빠지가 상상만큼 재밌지 않아 수상 레저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를 야심 차게 IMAX 관에서 관람했으나 어벤저스들이 지지고 볶고 싸우는 내내 열심히 잠들어 있었다는 경험으로 판타지 액션 장르엔 흥미가 없다고 자각한다.
기호를 더 갈고닦아서 내 이름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취향을 가져보기로 한다. 못다 한 덕후의 꿈을 이뤄볼 요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