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내 전공은 ’생명공학‘이다. (한 학기 만에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복수전공으로 국제학을 선택하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은 드라마를 업으로 하고 있다.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전공을 밝히면 백이면 백 묻는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되셨어요?” 그러게요. 생명공학과 드라마의 연관성은 얼마나 될까?
꽤 오랜 시간 거슬러 올라가면, 미드 <Grey’s Anatomy>의 엄청난 팬이었다. 지금처럼 OTT 서비스도 없던 시절, 매주 방송분을 다운로드하여 챙겨보았다. 시즌2 방송 때부터 챙겨보았으니 정말 오래됐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주인공 중 한 명이 되어 그들의 희로애락에 함께 울고 웃었다. 그러다 정신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의사가 되고 싶었다. 누구보다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자부했다.
그때 나는 굉장히 특별하다 생각했는데, 의대를 목표로 하기엔 그 누구보다 평범하다는 걸 고등학교 진학 후 깨달았다. 집안 외모 성적 모두 다(웃음). 그렇지만 평범한 나에게도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은 열려 있지롱!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해 입시는 모두 ‘생명과학(공학)과’로만 지원했다. 그렇게 ‘생명공학과‘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지만.. 진학 후 전공수업을 듣던 어느 날, 물리와 수학의 높은 벽을 뚫지 못하고 돌연 ‘의사는 이 재미없는 걸 매일 공부해야 한다면 나는 의사가 되지 않겠어’ 하는 결단을 내렸다.
나는 절대, 꼭, 의사가 되겠다는 믿음으로 학창 시절을 지내왔는데 근본이 사라졌다. 뿌리가 흔들리니 이리저리 정착을 못 하고 헤맸다. 전공은 쳐다보기도 싫어 어떻게 하면 전공을 살리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심지어 단신으로 외항사 승무원 준비까지 했었으니 나의 방황의 깊이가 참 깊었다. 감사하게도 주변 많은 지인들이 다양한 세일즈 직무에 소개해주신다고 했지만 전부 고사했다. 세일즈가 제일 자신 없는 분야였기 때문이었다.
전공 무관으로 취업하기에 광고/홍보/마케팅 직무가 가장 용이해 보여 그쪽으로 찾아보다 아주 작은 5인 미만 소기업에 입사했다. 드라마 ppl 마케팅 대행사였는데, 그땐 마케팅 대행이나 드라마 ppl 대행이나 뭐가 다르겠어하는 생각이었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입사한 곳은 내가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했던 ’영업‘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물론 드라마 촬영 현장도 가곤 했지만 가뭄에 콩 난듯한 부수적인 일이었고, 주 업무는 아웃바운드 텔레마케팅 세일즈였다.
예상대로 세일즈는 나의 성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싫어하는 일을 하기 위해 매일 출근하는 게 고역이었다. 출퇴근 왕복 네 시간의 수습 기간을 보내면서 많은 고찰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건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나오는 드라마‘였다는 걸 입사 삼 개월 만에 깨달았다. 유레카. 좋아하는 게 드라마였다니, 이걸 깨달은 순간 일사천리였다. 드라마를 만드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일념으로 수습기간이 끝나자마자 퇴사를 했다. 그렇게 여태껏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비로소 오게 된 큰 깨달음은, 세상에 ’절대‘ 는 없다는 것이다.
’절대‘ 의사가 되겠다는 중딩 연호는 현실의 벽에 무너졌고,
‘절대’ 영업 직무는 하지 않겠다던 이십 대 중반 연호는 영업으로 월급을 삼 개월이나 받았다.
인생에서 드라마는 오락거리이지 ’절대‘ 일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평생 가져가고 싶은 업이 되었다.
’절대‘라는 단어로 선을 그어 무한한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2023년 1분기를 반추하는 3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