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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Apr 22. 2018

마지막 흑석동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집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27년을 한 집에서 사는 경험은 흔치 않은 일인 것 같다. 내가 1살 때 까지 부모님은 할아버지 댁에서 살다가 흑석동 달마산 자락 작은 지층집에 둥지를 틀었다. 이 집에서 동생이 태어났다. 유치원과 초중고 대학교까지 이 집에서 통학했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꾀죄죄하고 비좁고 낡아 부끄러운 집이었지만 내 29년의 삶이 박제되어 있는 인생 박물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집을 처음 오래 떠나 있었던 뉴질랜드 어학연수부터, 고3시절 고시원생활, 1년 미국 교환학생 생활을 끝마치고 나서 어김 없이 캐리어 바퀴를 돌돌돌 끌며 돌아왔던 곳은 이 흑석동 집이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필름카메라로 찍어둔 첫째딸의 숱한 성장기록의 배경이 되어준 곳이 이 집이고, 부모님이 싸우실 때 이불 속에 콕 숨어서 눈물 훔치던 곳도 이 집이다. 집에 늦게 들어와서, 엄마에게 거짓말해서 등등의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회초리로 매를 맞거나 집 앞에서 벌을 서거나 반성문을 썼던 곳도 이 집이다. 구구단을 처음 외웠던 것도 이 집이고 동생이랑 지겹도록 싸우고 때리고 그러다가 새끼 손가락 뼈가 부러졌던 것도 이 집은 알고 있다. 어렸을 때는 옥상에도 자주 올라갔다. 거기서 불꽃놀이를 보곤 했다. 앞집 화단에 뭔가를 묻으며 놀기도 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밤새워 미술 수행평가 과제를 하고  시험공부를 했다. 피아노를 쳤고 눈높이 선생님이 다녀가셨다. 그 흔한 비밀번호 잠금장치도 없는 열쇠식 옛날 문이라 열쇠를 깜빡하면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한참 문 앞 계단에 앉아서 가족을 기다렸다.

고등학교 합격, 대학 합격도 이 집에서 처음 통지를 받았다. 안방 데스크탑으로 합격통지서를 열어보곤 곧장 부모님에게 전화했었다. 밤새 친구와 전화통을 붙들고 떠들기도 했다. 여러 날 아프기도 했다. 몇몇 남자친구들이 대문까지 데려다줬다. 고백을 받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치한을 만난 적도 있다. 그날은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았다.

이 안에서 울고 웃고 지지고 볶으며 1살배기 여자아이가 28살 성인으로 성장했다. 내 삶의 모든 에피소드를 이 집은 다 봤다.



이런 집을 떠나온지 6개월이 다 되어감에도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너무 깊이 내 삶에 배어들었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그 모든 풍경 사물 하나 하나가 눈 앞에 선명하다.

꿈엔들 잊힐리야. 나의 첫 번째 집. 그렇게 지긋지긋하고 떠나고 싶었는데, 왜 떠나고 나니 그리운지. 다시는 갈 수 없다. 재개발로 사라지게 될 집. 아직 잘 있을까?


1만번은 넘게 오고 갔을 중대부중 옆길. 스마일 떡볶이와 방글슈퍼는 초등학생 시절 나에게 참새방앗간이었다. 스마일 떡볶이 아주머니가 간장을 넣고 만들어 색이 약간 거무튀튀한 특제 떡볶이와 프렌치 토스트 만드는 과정을 한참이나 지켜봤었다.

역시나 1만번 넘게 넘어다녔을 담장. 힐을 신고도 폴짝 잘도 넘어다녔다.

어릴 적에는 청호아파트가 내가 아는 가장 큰 아파트단지였다. 지금은 그 옆으로 +자형 신식 아파트들이 숱하게 세워졌다.

앞집 화단에 자라는 적겨자채

학교 가는 길-

길에 방치된 화단들

이 길의 목련은 늘 온 동네 꽃 중 가장 먼저 피었다. 그래서 계절이 바뀐걸 가장 먼저 알려주는 봄의 전령이었다. 나는 매 해 봄의 기척을 저 목련나무로 알 수 있었다. 2018년 봄은 목련을 보지 못한 첫 해였다.

하교하는 길-

지름길이라 늘 이 샛길로 다녔다.

장미꽃이 아름답게 핀 주택. 어렸을 때는 저런 집에 누가 살까 궁금했었다. 가끔 대문이 열려있을 때 안쪽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정원에 잔디가 정돈되어 있었고 현관은 고풍스러웠다. 어린 마음에는 저런 집에 살고 싶었다.


김포세탁소 옆

집 뒤쪽 좁은 공간. 아슬아슬하게 담을 넘으면 보일러실로 이어진다. 어렸을 때 동네아이들과 뒷골목 새앙쥐들마냥 이 곳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아버지는 이곳에 키운 상추나 고추는 가끔 밥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한 번은 가족이 모두 거실에서 TV보고 있을 때 이 창문이 털려서 안방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강도가 아니고 좀도둑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이곳에 서서 달마산 쪽을 바라보면 기분이 탁 트이곤 했다. 이 풍경은 흑석동의 개발과정을 따라 지금까지 조금씩 계속 바뀌어왔다.

담장아래서 내려다 본 아랫집 지붕

93년 추석인가보다. 어렸을 때는 집에 큰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중학교 때였는지 고등학교 때였는지 민화 그리는 미술 수업에서 그려낸 소나무. 내가 그려놓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특히 옹이 부분이) 방에 붙여놓았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기형도 시의 한 구절은 나의 고3시절을 버팀목이었다.

동생이 키 재던 벽

햇살이 듬뿍 들어오던 화장실 창

현관 옆 우유백에 열쇠를 넣어두곤 했다.

부엌

앞집에 주렁주렁 열린 풋고추


하수구로 이어지는 작은 구멍

아주 어릴 적부터 있었던 파라솔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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