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이 집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27년을 산 흑석동 집을 뒤로 하고 우리 가족의 생애 두 번째 집이 되어줄 보금자리는 조금 더 깨끗하고 산뜻한 곳이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집도 27년을 살면 때가 타고 꼬질꼬질해진다. 하물며 맞벌이 하며 애 둘 키우느라 인테리어는 엄두도 못 냈던 부모님과, 젖먹이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온 집안에 생애주기의 궤적(중학교 때 그린 미술 수행평가, 수학 올림피아드 메달, 키를 쟀던 벽, 초등학교때 만든 글라스데코, 고3때 스탠드에 써둔 문구, 중학교때 쓴 포스트잇 편지, 서랍 안 스티커사진들, 출생기록카드 등)을 온 집안 구석구석 질펀히 묻히며 자란 나와 내 동생에게 집이란 '겨우 잠만 자는 곳'이었다. 물론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집이라 나에겐 각별한 공간이었지만, 인테리어라는 것을 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켜켜이 쌓인 우리 네 식구의 흔적이 한 데 뒤섞여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삶의 때가 타버려 아무리 청소를 해도 결코 쾌적해지지 않는 집이었다. 아무리 여행을 가서 예쁜 인테리어 소품을 발견해도 (소품 한 두 개로 될 문제가 아니라) 쉽사리 살 수 없는 그런 집.
그래서 내 마음의 1순위는 신축빌라였다. 그러나 교통 편의성과 거실이 넓게 빠졌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지금의 북가좌동 집을 맘에 쏙 들어하셨고 나는 탐탁치 않았다. 오래된 90년대식 한국 가옥 특성은 종합세트로 다 갖춘 집((체리색몰딩, 체리색 문과 창틀, 낮은 천장 등) 이었던 이유도 크지만 무엇보다 기존에 살던 분들의 생활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무색무취한 하얀 도화지같은 집에서부터 출발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테리어를 하기가 수월한데, 아버지는 이 집을 처음 보는 순간 꽂혀버리셨다.
고심 끝에 아버지가 원하는 집으로 계약을 했고, 이왕 이렇게 된 것, 때 빼고 광 내서 산뜻한 우리 집으로 개조해보자. 라는 결심으로 시작한 셀프인테리어.
이사와서 본격 셀프인테리어 하던 날. 아빠는 등을 달고 동생과 나는 가구조립 엄마는 청소 및 가구배치를 담당했다.
무려 그림판으로 그린 도면. 왕년 실내건축학과 졸업생의 비루한 그림판 도면...이래 뵈도 나름 축적을 다 계산해서 넣은거다.
before.
지저분했던 주방 벽. 도배를 다시하고 촌스러운 등갓을 떼어버렸다.
after.
로즈골드 프레임의 램프등을 달고 렌지대를 세웠다. twg와 kusmi tea 틴케이스들을 놓았다.
before.
체리색 몰딩의 결정체인 공간. 몰딩을 모두 흰색으로 페인트칠하고 싶었지만, 오래 살 집이 아니고 무엇보다 페인트칠을 해야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체리색을 무난하게 아우를 수 있는 어두운 그레이 계열로 메인컬러 결정.
after.
못생긴 전등커버를 제거하고 행잉 알전구 6줄을 달았다. 괴랄한 아트월을 떼어내고 진회색 벽지로 깔끔하게 마감했다. 거실에서 TV를 추방시키고 책읽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6인용 원목테이블과 벤치를 놓았다. 반대편 벽은 프로젝터를 쏘면 영화를 볼 수 있다.
아트월이 있던 자리에 선반과 액자를 두어 밋밋함을 해소했다.
카페같은 공간이었다가, 일도 하고 책도 보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보는 곳.
지난 가을 이탈리아 가족여행 사진을 걸어두었다.
이탈리아에서 내내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며 저녁을 직접 요리해먹었는데 그 기억이 참 좋았다.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엄마 아빠 동생과 하루종일 붙어서 삼시 세끼를 같이 먹었다 무려 11일동안이나. 같이 장보고 재료손질하고 요리하고 상치우고 설거지하는 그 과정이 너무 특별하고 즐거운 경험이어서, 사실 두오모성당이나 콜로세움을 보는 일은 가족여행에서 덤과 같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일상에서도 같이 요리하는 이벤트를 가져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 테이블은 이탈리아 여행의 저녁식사를 상기시키기에 딱 적당한 크기다.
스탠드조명 하나만 켜놓고 eddie higgins trio 음악을 틀고 와인잔을 부딫히면 이탈리아로 타임워프한 것 같다.
엄마와 아들
before.
채광이 무척 좋아 내 방으로 점찍어둔 이 방은 굉장히 좁다는게 단점이다. 거의 똑같은 크기의 방이 하나 더 있는데(동생 방) 이 두 방은 2층침대를 놓아 아래쪽 공간을 확보해 효율적으로 공간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들이 둘 있는 가족이 살던 집이라 어쩔 수 없는 생활의 흔적이 집안 곳곳에 묻어있다. 가령 상장을 붙여놓은 접착제가 벽에 남았다던지, 의자 스치던 벽 부분이 까맣게 때가 탔다던지. 그래서 벽지와 장판 모두 새로 했다.
after.
무채색 계열로 꾸민 내 방.
2층 벙커침대로 아래 공간을 확보했고 1인 접이식 소파와 티테이블을 두었다.
아늑하게 핀라이트 조명을 달아 독서등으로 쓴다.
수납공간과 화장대
여행다니며 모은 마그넷과 폴라로이드를 붙인 캐비닛
before.
거실이 넓은 대신 안방이 좁아서 자칫 답답해 보일 수 있다. 오래된 칙칙한 커튼을 떼고 장판은 새로 했다.
after.
낮은 침대프레임으로 공간이 덜 답답해 보이도록 했다. 진회색과 인디안핑크가 공간의 메인컬러로, 아늑하고 따뜻하면서도 세련된 침실을 만들고 싶었다.
수납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장롱 위 공간에 공간박스를 두었다.
서랍장 위쪽 활용한 화장대
1. 소소하게 집꾸미는 재미를 알았다. 공간을 정돈하며 정말이지 공간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느꼈다. 그 공간의 양태에 따라 내 행동이 바뀐다. 다만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삶에서 허락될 때 비로소 자연스레 공간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미국에서 교환학생하며 방문한 집들은 왜 그리 가족사진 액자며 인테리어소품이 많은지가 궁금했는데, 직접 해보니까 알겠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홈퍼니싱 시장은 전망이 좋다.
2. 식물 키우는 재미를 알았다. 이번에 양재 꽃시장에 처음 가서 부모님과 식물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여러 관상용 식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반려동물만큼은 아니지만 식물도 잘 자라게 하려면 충분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 스스럼 없이 지인을 집에 초대하게 되었다. 예전엔 누추한 집에 누군가를 집에 들이는 일이 퍽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집도 궁전같이 넓고 삐까뻔쩍한 집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석구석 내 손 안 닿은 데 없이 사연을 품은 재미있는 집이 되었다. 커튼이든 화분이든 테이블이든 누군가가 놀러와서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어쩌다 이 물건이 여기 우리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정을 이야기해 줄 것 같다.
4. 집이 삶의 중심터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북유럽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북유럽 인테리어가 발전했는지도. 행복지수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 및 하루 중 차지하는 비율과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 집에 오래 있을수록 가족구성원과의 대화빈도나 친밀감이 높아지고 그게 행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사오기 전에는 집은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집에서는 사실 잠보다 훨씬 다양한 활동이 일어날 수 있다. 그 활동은 관계를 강화한다.
내 방 화장대 거울
밤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형광등을 쓰지 않아 집 분위기가 아늑하고 어둡다.
지안님이 귤 한통 사가지고 놀러왔을 때. 내 커뮤니티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할 수 있다는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