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 시차가 다정하고 무해하길 바라며
나는 대륙 사이에 시차가 있듯, 인간 사이에도 시차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시차 그 자체는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주어진 환경 같은 것이기에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가 다정하고 무해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누군가와 함께 웃고 또 함께 우는 동안, 나는 우리가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우리 사이의 시차가 너그럽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편지'에도 시차가 있다. 아니, 편지야말로 시차를 전제로 존재하는 연결수단이다. 일단,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적어 넣는 시간과, 편지를 읽는 사람이 거기에 적힌 마음을 짚어 내는 시간이 다르다. 편지에는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둘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뜨거운 마음을 읽어 내려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뜨거움이 현재 진행형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건 마치, 그래, 별빛과 비슷하다.
게다가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상대의 반응을 살필 수도 없다. 오로지 들여다 볼 수 있는 건 내 마음과 내 마음 속 상대방뿐. 그러다보니 대화에서는 어느 정도 제어가 됐을 것 같은 감정까지도 전부 쏟아져 나온다.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한 마음이 편지에 담긴다. 그 정도로 솔직한 마음을 편지지에 옮겨 놓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대화를 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결국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치만 결국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뿐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바로 편지라는 매체다. 수신인에 애인 이름을 써넣으면 하고 싶은 말이 마음에서 우르르 쏟아지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뒤틀리는 부장님의 이름을 써넣으면 마음은 메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버릴 테니까. 어떤 사람을 떠올렸느냐에 따라 마음의 습도가 이렇게나 달라져버린다는 것 역시 편지의 매력이다. '수신인'은 이름으로만 존재하지만 바로 그 이름이 편지의 습도를 결정한다.
내 마음에서 길어올린 문장으로 쓰여졌기 때문일까? 편지는 첫인사와 끝인사를 제외하면 꼭 일기 같다. 뭐랄까, 착한 말투로 쓴 다정한 일기. 물론 일기와 편지는 분명히 다르다. 일기가 '나의 우주'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라면, 편지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우주'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다. 태생부터 다른 둘이지만, 그래도 어딘가 닮아 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들여다보기 부끄러워진다는 것 역시 그 닮은 부분 중 하나일 테지.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들춰보는 옛 일기는 낯설고 부끄럽다. 분명히 내가 거쳐온 과거지만 그래도 역시 과거의 내 마음을 마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편지는 언젠가 부끄러워 질 게 분명한 흔적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변태적인 행위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 과감하고 변태적인 도전은 우리 사이의 시차가 이미 충분히 너그럽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우리 사이의 시차가 너그럽고 무해한 것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편지'란 몹시 뜨거운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