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쉬지 않고 계속 올 거야

우울을 대하는 마음가짐

by 둥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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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와 면담을 했다. 한 달 동안 일정 시간을 초과하여 야근을 한 경우에는 의사와 면담을 해야 하는 것이 이 회사의 룰이기 때문이다. 푸근한 인상의 선생님은 나에게 이것 저것 묻고 확인하더니, 잘 하고 있네요, 라고 말했다. '환자가 거짓말 하는 걸 수도 있잖아. 어떻게 환자 말만 믿고 저렇게 쉽게 괜찮다고 단정하는 거지?' 잠깐 궁금했지만.. 일부러 그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균형을 잡았다. 언젠가부터 이런 식의 보정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 괜찮아? - 괜찮아 ]로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굳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괜찮지 않은 마음의 안부가 먼저 걱정될 정도로 나는 나를 숨기며 살아왔다. 괜찮지 않은 마음으로 괜찮다 말하며.


지난 달에는 어떤 일을 했느냐는 질문에 작은 오픈을 하고 효과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효과를 분석하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이라 스케줄과 업무량을 내가 통제할 수 있어 편했지만 때때로 고독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혼자 하는 일이라 때때로 고독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지만 스케줄과 업무량을 내가 통제할 수 있어 편했다고 고쳐 말했다. 의사 아저씨는 일이 힘들어도 리프레쉬를 잘 하고 있으면 괜찮다고 하면서, 리프레쉬를 잘 하고 있냐 물었다. 나는 가장 최근에 다녀온 미사키구치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미사키구치에 지금 가면 뭐가 있을까?' 혼잣말을 하듯 중얼댔고, 나는 '참치..?'라 혼잣말을 하듯 대답했다. 아저씨는 '참치 좋지.'하고는 웃었다.


"자기 페이스로 일을 컨트롤 하지 못하면 일은 끝도 없이 쌓이기만 해요. 그러면 '아 내가 일을 못 하나?'하고 자괴감을 느끼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밤에 잠도 안 오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업무 시간에 집중을 제대로 못 하겠죠? 그럼 업무 퍼포먼스는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럼 다시 자괴감을 느끼게 되어요. 그야말로 악순환이죠. 그래서 이런 면담을 하는 거예요. 악순환의 고리 속에 있다면 그걸 끊어주려고. 그런데 당신은 그런 타입도, 또 성격도 아닌 것 같으니 괜찮아요. 잘 하고 있어요."라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아저씨는 면담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아니에요. 그 악순환, 어떤 건지 너무 잘 아는데요.. 저는 그냥 괜찮지 않은 마음으로 괜찮다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나는 웃는 낯에 갇힌 채 입을 벙긋대며 고함을 쳤다.


그러다 문득 이 사람에게는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이 사람이라면, 그리고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마음 아파 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처음으로 물에 빠졌을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던 건 당시 내 시야에 들어와있던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내 옆에서 같이 허우적 댈 사람이 아니라 육지에 당당히 발을 붙인 채 침착하게 튜브를 던져줄 사람이야.


손목시계를 보며 남은 시간을 가늠하는 아저씨에게 근데요, 제가.. 라며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내가 가끔 육교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지하철을 기다릴 때 마음을 어떤 식으로 다잡는지,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기분이 되는지, ... 아저씨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 듯 약간의 중언부언을 했고, 나는 단어를 바꿔가며 몇 번의 질문을 더 했다.


그런 식의 웜업이 한 차례 끝난 뒤 아저씨는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파도가 뜸해지고 또 낮아지는 걸 조금씩 보다 보면, 이 다음에 무서운 기세로 파도가 다가올 때도 그 잦아드는 파도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을 거예요. 파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너무 간절히 하다 보면, 그 생각 자체가 '파도가 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으로 전이되기 쉬워요. 그러면 약간의 산들바람에도 집채만한 파도를 상상하게 되고요. 그러니까 그냥 앞으로의 남은 인생에도 파도는 쉬지 않고 계속 올 거라 생각하세요.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파도가 오긴 할 테지만 감당 못 할 수준의 파도가 오지는 않을 거야,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는 파도가 올 거야.' 중요한 건 파도가 다가오는 것 자체에 대한 불안함을 내려놓는 거예요." 아저씨는 '파도'보다는 '기복'이라는 의미에서 波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 테지만, 나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끝없이 밀려왔다가 결국엔 하얀 포말이 되어 사라지는 파도를 떠올렸다. 언제쯤 파도가 올까, 뒤를 흘낏대며 일어설 준비를 하는라 부산한 서퍼들의 모습을 상상 속에 그려넣었더니 왠지 조금 더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이런 이야기를 주기적으로 하는 것도 파도와 친숙해지는 좋은 훈련이라고 했다. 시간이 되는 한 마주앉아 주겠다고 말한 아저씨는 이내 시간이 안 되어도 그렇게 해주겠다고 고쳐 말했다. 총무팀에 연락처를 두고 갈 테니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그 말에서 마음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처음 본 사람과 예정에도 없는 깊은 대화를 나눈 하루라서 인상적이었고, 울지 않고 저런 이야기를 끝까지 마친 건 처음이라서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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