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되지 않는, 생각지도 못한,
문이 닫히려던 찰나에 꼬마애들 네 명이 우르르 열차에 올라탔다.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인 걸까?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아이 셋에 여자아이 하나. 열차에 오른 아이들은 넷이었는데 비어있는 자리는 셋이었다. 제일 가장자리에는 여자아이가 앉았고, 남자아이 셋은 나머지 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가벼운 몸싸움을 벌였다. 꽤나 쌀쌀한 날씨에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있던, 개중에 제일 덩치가 큰 아이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왜소한 아이를 밀어냈다. 왜소한 아이는 분하다는 듯 빼앗긴 자리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남자아이 둘은 버티고 선 아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왜소한 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출입문 옆으로 자리를 옮겨 섰다.
아이는 거기 가만히 선 채 감정을 삭혔다. 아이의 작은 얼굴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나는 일분일초가 다르게 변하는 아이의 표정을 조용히 살피며 아이가 울지 않길 바랐다. 여기에서 울음을 터뜨리면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 아이들의 놀림을 받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아이의 표정을 살피는 동안 나는 아이와 눈이 두어 번 마주쳤는데, 그 때마다 '괜찮아,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마음을 열심히 건넸다. 불만과 분노, 부끄러움과 슬픔이 빠르게 교차하던 아이의 표정은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이 저 아이에게는 배움의 시간일 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늘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 울기만 하면 엄마아빠가 달려들어 모든 걸 해결해주던 시기는 지났다. 아이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경쟁하며 '가장 특별한 존재'인 줄만 알았던 자신이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중이다. 저 꼬마가 오늘 깨달은 '이 세상이 늘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는 사이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라는 생각으로 변형될 지도 모르지. 요즘 내가 그렇듯 말이다.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라는 생각은 무척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라서 '청소년 권장사고' 목록에 들어가는 건 꿈도 못 꿀 것 같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해서 꼭 박멸대상인 것은 아니잖아? 예를 들어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다 보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마음대로 되는 날엔 엄청나게 기뻐할 수 있으니까. 즉, 인생에 대한 기대치를 완전히 내려 놓으면 의외로 사는 게 좀 수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 마음 속 부정적 인간이 이런 식의 변론을 펴면 내 마음 속 긍정적 인간은 팔짱을 낀 채 (긍정적 인간인 주제에 자세가 아주 삐딱하다.) 이렇게 일갈한다. "얘! 그게 어디 사는 거니?" 뭐,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인생에 대한 기대치를 완전 내려놓는다는 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로 치환해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면 딱히 대단한 성취가 없었더라도 그저 오늘 하루 무사히 살아남은 것에 대해 안도하고 감사하게 되겠지. 자, 그러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답이 필요한 나는 조금 전 호통치듯 일갈하던 긍정적 인간에게 답을 요구하지만, 그런 멍청한 질문에 대답하는 건 자기 의무가 아니라는 듯 긍정적 인간은 내 눈을 피한다. (긍정적 인간인 주제에 자세가 아주 삐딱하다니까.)
두 명의 남자 아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여전히 킥킥대며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안경을 쓴 여자 아이는 건너편 차창 너머로 바쁘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 듯 멍한 눈을 하고 있다. 그 옆에 선 왜소한 남자 아이는 여전히 감정을 추스리느라 바쁘다. 표정으로 짐작해보건대 불만과 분노, 부끄러움과 슬픔은 어느 정도 지나가고, 이제는 체념에 접어든 것 같다. 이 때 먼 곳을 보던 여자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왜소한 남자 아이를 올려다본다. 제 감정을 추스리느라 정신없던 남자 아이는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을 허둥지둥 맞는다. 아무 말 없이 남자 아이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던 여자 아이는 남자 아이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건 아마 조금 전 있었던 의자 뺏기 경쟁과는 아무 상관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남자 아이는 잊어버린 단어를 기억해내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대다가 신중하게 대답한다. 그렇게 둘의 작고 조용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 아이의 얼굴에 어려 있던 그림자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간 웃음이 조금씩 번져간다. 싸움에 진 짐승처럼 주눅들어 있던 아이가 환하게 웃는 걸 보니 내 마음도 조금은 보송보송해진다.
아이에게 오늘은 어떤 날로 기억될까? 억울하게 자리를 빼앗긴 날, 그래서 구석에서 마음을 혼자 달랬던 날, 그치만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은 날, ... 그래, '이 세상이 늘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에는 '이 세상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가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던 긍정적 인간이 헐떡대며 내게 달려와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야.. 방금 그 생각.. 괜찮은 것 같다..." 이 녀석은 워낙에 삐딱해서 제 스스로 답을 주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지금처럼 좋은 재료를 발견하면 와서 알려주기는 한다.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어쨌든 그 덕에 나는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진술 옆에 '이 세상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진술을 나란히 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