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놀았다. 친구와 함께 천피스 퍼즐을 맞췄고 (이번에는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월리를 찾았으며, 게임을 실컷 했다.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중간 중간 즐겁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는 시냇물 같은 사람이다. 투명하고 시원하다. 반면에 나는 우물에 가깝다. 두레박을 던져보지 않으면 물이 고여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고, 애써 두레박 한 가득 무언가를 길어 올렸다 해도 물인지 독인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우물이라는 사실을 슬퍼하며 살아왔다. 시냇물이 좋아보여 그렇게 살아보려고도 했고, 그 결과 시냇물 흉내를 얼추 낼 수도 있게 되었지만, 시냇물이 될 수는 없었다. 뭐, 우물에게는 우물 나름대로의 좋은 점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여기 아닌 다른 우주에는 어쩌면 우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을 시냇물이 있을 지도 모르고 말야. 만약 내 앞에 나 아닌 다른 우물이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면 나는 걔에게 우물의 좋은 점을 열개 스무개 말해줄 거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두레박을 길어 올리는 거 너무 낭만적이지 않니?' '도르래가 삐걱대는 소리는 꼭 노랫소리 같다고 어린왕자가 그랬어. 네 도르래에서도 멋진 노래 소리가 나는구나', ...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는 건 쉽지 않을까?
시냇물 친구는 '너는 왜 우물이니? 속을 알 수 없어 불편하구나!' 같은 소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처럼 시냇물로 사는 게 어때?' 하는 오지랖을 부리지도 않았다. 시냇물 친구는 우물로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그게 너니까 괜찮아.' 류의 수용이라기보다는, '도르래랑 두레박을 움직이는 게 참 재밌어. 넌 참 즐거운 우물이구나.'류의 수용에 가깝다. 그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마음이다. 시냇물 친구와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좀 슬퍼진다. 시냇물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가능한 것들이 나에게는 하나도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라서 슬프고, 그 슬픔을 가리기 위해 자꾸 시냇물 흉내를 내게 되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슬프다.
정갈한 병에 담긴 제주 삼다수 같은 사람들이 '음, 그런 우물 같은 태도로는 곤란하지요.'라고 말하는 곳에서 무리하게 삼다수 행세를 하느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래서 난 '넌 참 즐거운 우물이구나.'라고 말해주는 존재와 시간을 함께 한다면 즐겁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 조각의 슬픔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네. 주변의 환경이 바뀌며 극적으로 개선되긴 했지만, 핵심정서가 그대로인 이유는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왜 나에게 눈을 흘기며 손가락질 하는 걸까. 만약 내가 대단한 결심 없이, 타고난 내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제주 삼다수 같은 사람들 틈에서도 그럭 저럭 잘 지낼 수 있었을 지도 몰라. 그러면 내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한 건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는 건가? ... 이런 문장으로 이야기를 끝맺으려 하면 상담 선생님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무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탓하지는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