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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Nov 13. 2018

자책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

건강한 균열을 원해요


외할머니가 장에 천공이 생겨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에게 그 소식을 들었던 날 나는 잠을 한 숨도 못 잤다. 외할머니에 대한 걱정보다는 엄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엄마 아빠에 대한 걱정이다. 그 걱정이라는 게 사실 답이 없다. 내가 걱정을 한다고 그들의 마음이 나아지는 건 아니니까. 심지어 그들의 마음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들의 행복을 바라고 또 그들이 슬프지 않도록 바랄 수야 있겠지만, 행복과 슬픔은 철저하게 그들의 영역이다. 내가 슬프고자 할 때, 세상 그 어느 것도 나를 슬픔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몫이 아닌 감정 때문에 고민하는 것에는 답이 없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가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냥 전하는 것뿐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반복되는 고통 속에 이런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결론을 가지고 있다 해서 고통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느끼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인데, 그 노력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담보하지는 않으니까.


사실 이 유별난 걱정은 스스로를 좀먹을 뿐만 아니라 관계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관계 자체를 원망하게 되고 회피하게 되니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잃고난 후의 상실감이 두려워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는' 자세로 삶을 살게 된다.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으려는 나와, 각별한 관계를 잔뜩 만들고 싶은 나는 그래서 늘 투쟁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에게 언제쯤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쯤 눈물을 흘리며 위안을 나누며, 그렇게 최초의 악수를 할 수 있을까.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자책을 심하게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평가'는 외려 스스로 가지고 있는 '높은 기준'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자책을 심하게 하는 사람들일 수록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높다는 이야기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라는 말은 결국 모든 것을 자기 통제권하에 두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기도 하다. 문제의 원인으로 자신을 지목하는 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볼까. '우리 가족의 불행은 내 책임이야'라는 생각에서 일단 보이는 건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이지만 사실 거기에 숨어 있는 건 '내가 제대로 하면 우리 가족은 행복해 질 수 있어.'라는 희망이다.


'우리 가족의 불행이 내 책임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가족의 행복'과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이 족쇄를 끊어줌으로써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지만 동시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우리 가족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한계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인 세상에서는 상대방의 모든 문제를 자기 것으로 끌어와 고민하게 되는데, 그게 지나치면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 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버릇처럼 자기 안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은 자기를 수정함으로써 외부세계를 수정하려는 셈인데 실제로 우리 인생은, 특히 관계에서의 문제는 그렇지 않다. 혼자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이 세상엔 분명히 있다, 아니, 사실 혼자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인 게 이 세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희망을 놓치기 싫어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예전에는 '포기' 혹은 '체념'이라 치부하며 멀리했던 이런 생각들을 요즘에는 하루 3번 식후 30분 이내에 물 없이 꿀떡 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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