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뱀이 부럽긴 하지만
해녀가 되기 싫어 도쿄로 떠난 하루코는 고향을 등지던 때의 자기 나이만큼 자란 딸 아키의 손을 잡고 24년만에 고향을 다시 찾는다. 하루코를 고향으로 불러들인 옛 친구는 쇠락해가는 마을을 되살리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목소리 높여 얘기한다. 하루코는 친구를 바라보며 말한다. "너는 참 이렇게 시시한 마을이랑, 이렇게 시시한 기차를 위해서 잘도 그렇게 뜨거워지는구나." 비아냥이 훨씬 많이 섞인, 어떻게 들어도 칭찬은 아닌 그 얘기에 하루코의 친구는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긁적이며 말한다. "에이, 뭘. 별 거 아냐..."
바다를 평생 지겨워만 했던 엄마와 달리 아키는 넘실대는 바다에 마음을 금세 빼앗긴다. 이제 막 물질 하고 나온 할머니에게 신난 표정으로 이것저것 묻는다. 할머니, 발이 바닥에 안 닿을 텐데 무섭진 않아? 바다 속에서는 무슨 생각 해? ... 할머니의 대답을 다 듣고도 여전히 신기하단 표정으로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키에게 할머니가 넌지시 묻는다. "같이 들어가볼까?" 아키는 주저하면서 됐다고 한다. 추울 것 같고, 헤엄도 잘 못 치고, 맨몸으로는 무리일 것 같다고. 그런 말을 하면서도 끝내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아키를 물끄러미 보던 할머니는 손녀의 등을 툭 밀어버린다. 물 속에서 허우적 대던 아키가 겨우 물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할머니는 호탕하게 웃으며 튜브를 던져준다. 그리고는 말한다. "발이 바닥에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 나니? 어차피 뛰어들기 전에 이것저것 생각한다 해도 생각대로는 안 돼. 그럴 거면 그냥 생각하지말고 뛰어들어." 아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환하게 웃고 아 참 기분 좋다- 한다. 할머니에게 떠밀려 바다에 빠졌던 아키는 다음 날 오후 등대 주변을 맴돈다. 무서움에 주춤 주춤 하지만, 결국엔 생각을 떨치고 자기 발로 바다에 한 번 풍덩 뛰어 든다. 그리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바다에 풍덩 뛰어드는 아키의 모습이 좋다.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저런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는 말수 적은 아이가 살고 있다. 그 말수 적은 아이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혹은 그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결국엔 물 속으로 뛰어든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 역시 그러했다. '나'는 끊임없이 부끄러워한다. '다음 생에는 제대로 살 수 있겠지.'라고 버릇처럼 체념하면서도, 당신은 절대 그 줄을 끊어내지 못할 거라는 조르바의 지적에는 보란 듯이 끊어낼 거라고 오기에 가득 차 대답한다. 감정은 숨기고, 생각은 키운다.
하지만 조르바는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사내다. '나'처럼 배운 사람들이 쉽게 풀지 못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풀어 낸다. 아무도 풀 수 없었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너무나도 쉽게 잘라내던 알렉산더 대왕처럼. 그래서 '나'는 조르바에게서 뱀을 본다. 간악함과 교활함의 상징으로서의 뱀 말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이 땅과 온몸으로 접촉하며 살아가는 왕성한 생명력의 뱀. 그에 비하여 자기처럼 글 좀 쓰는 교육받은 자들은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이라 말한다.
쉼없이 끝없이 날아도 어디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나뭇가지 하나 발견되지 않는 고단한 날에는 새도 뱀을 보며 부럽다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하지만 날개를 가진 새가 '왜 나는 뱀이 아닐까.'', '왜 나는 하필 새로 태어난 걸까.', '어떻게 하면 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건 너무 큰 비극 아닐까. 먹고 자는 시간을 쪼개서 노력하면 뱀처럼 온몸으로 바닥을 기어가는 새로 살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 '세상에 이런 일이'나 'TV 동물농장' 같은 곳에 소개될 수야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뱀처럼 바닥을 기는 새'로 소개될 뿐이니까. 정말 뱀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마음이 괴로울 땐 거기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평화롭게 사는 다른 이를 흉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뱀처럼 바닥을 기는 새'가 된다고 해서 새가 느끼는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결국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건 온전히 자기 몫이다.
그렇다고 인생이 외롭기만 한 건 아니다. 우리에겐 이야기가 있으니까. 서로의 괴로움과 서로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고군분투를 응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