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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Nov 25. 2018

소리굽쇠와 농담

우리에겐 기괴한 포옹이 필요해


에너지 넘치는 남편과 결혼한 아내는 생각지도 못한 피곤함을 느꼈다. 남편이 묻는 말에 평범한 텐션으로 답했을 뿐인데, 무슨 안 좋은 일 있냐고 걱정스런 목소리고 끈질기게 묻는 남편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건 좋았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목소리를 세 키쯤 올려서 '좋은 아침이야 우리 사랑하는 자기'라고 인사하는 건 그녀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던 아내는 누군가를 책망하기보다는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았다. 그녀는 피곤해질 때면 장롱 속에 숨어 들어가 소리굽쇠의 소리를 듣는다. 혼자 있는 그 어둡고 작은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은은하게 메워주는 소리굽쇠의 울림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고 한다. 
  
다른 부부의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손잡이 위에 작은 물병이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었다. 대체 이게 왜 여기 있지? 라는 생각을 한 남편은 약간의 질책을 섞어서 아내에게 물었다. "이거 언제 치울 거야?" 그러자 아내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오늘은 장 봐야 해서 바쁘고, 내일은 스케줄이 있으니까.. 모레 정도?" 남편은 화를 내는 대신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바쁘구나. 알았어. 내가 치울게."라고 답했다. 이 작은 대화를 마친 뒤 둘은 아침을 먹었다.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로 차려진 간소한 밥상이었다. 남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취재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 와이프의 계란 후라이 성공률은 5할이에요. 20년 경력에 5할. 오늘은 어떨지 긴장되네." 계란 후라이를 한입 먹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남편.  



그 사람의 그러함이, 우리 관계의 특별함이 되기도 하고, 도저히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의 그러함에 대하여 장롱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소리굽쇠 소리를 듣기보다는, 그 사람과 함께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아, 오늘도 실패다. 계란 후라이는 진짜 심오한 요리라니까.' 하는 두 사람만의 시답잖은 농담을 만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장롱 속에서 혼자 소리굽쇠의 소리를 듣는 것 역시 좋은 요양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함께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 외려 실제의 관계를 억압하는 건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강박인 것 같다. 남편과의 시간에 피곤함을 느끼는 아내의 경우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왜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과의 시간을 100% 즐길 수 없는 걸까. 저렇게 순수하고 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인데... 아, 혹시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내게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걸지도 몰라.


아내는 자신이 만들어 낸 부정적 질문에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마음으로 노력할 지도 모른다. 남편과의 시간을 100% 즐기기 위한 노력, 남편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려는 노력. 하지만 그건 '남편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그 의도가 어떻든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나는 그런 면에서 소리굽쇠를 통한 혼자만의 요양을 발견한 아내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창조적인 해결책인가. 이 독특한 해결책은 '혼자 있고 싶은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무해하다. 


아내가 장롱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동안 남편은 조용히 자기 몫의 집안일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 역시 자신이 만들어 낸 부정적인 질문과 싸워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내가 혹시 미쳐버린 건 아닐까. 내 사랑이 아내에겐 부족한 걸까. 나의 표현 방식이 아내에게는 맞지 않는 걸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아내가 더 행복해질까.' 하지만 남편 역시 그 모든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아남아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 남편은 이제 아내가 '자신과 달리'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이해한다.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지만, 아내가 그런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이해한다. 


한 명은 장롱 속에 들어 앉아 있고 한 명은 조용히 설거지를 하는 부부의 모습이 처음에는 좀 기괴해보였다. 하지만 사연을 알고 나니 외려 그게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끌어안는 모습으로 보였다.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서로에게 지옥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만나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한 기괴한 포옹이 필요한 것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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