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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Nov 29. 2018

입체적이고 무해한 세상

'원래 그런 거야'와 함께 살기 


도쿄 긴가자라는 이름의 절에는 독특하게도 플라네타리움 투영기가 있다. 천문학에 관심이 있는 주지스님이 구입한 것인데, 아마추어 마술사이기도 한 괴짜 주지스님은 그 투영기를 가지고 천체 강좌를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절에서 보는 별이라니-'라는 생각으로 신기해서 서너 번 갔었는데, 마지막으로 갔던 날 공교롭게도 투영기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다. 방정리를 하다가 그 날 끄적였던 손일기가 있길래 옮겨둔다. 요즘엔 손일기의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주지스님이 컴퓨터를 재기동 하는 동안 다른 해설자가 당황하며 어떻게든 해설하려 했고, 그들 못지 않게 당황한 사람들 역시 어떻게든 관람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컴퓨터와 투영기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밝아서 마땅히 보여야 하는 별 대신 서로의 당황스러운 얼굴만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 주지스님은 사태를 수습하려는 노력보다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 망할 놈의 컴퓨터'로 요약되는 분노를 여과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나는 저 주지스님처럼 행동하지 말아야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당위'를 끌어낸 뒤 그 당위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익숙한 사고 패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은 어째서인지 당위와 다짐의 연쇄에서 좀 자유로웠다. 그래서일까? 주지스님이 볼썽사납다는 생각보다는 애써 준비한 강좌가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속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지스님의 분노에는 속상함과 미안함이 숨어 있었다. 평소라면 당위와 다짐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분노 속에 숨어 있는 속상함과 미안함 같은 건 볼 여유도 없었을 테지만 그 날은 그게 다 보였다. 


당위와 다짐의 세상은 납작하지만, 감정과 표현의 세상은 입체적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동그란 구멍을 통해 세모난 세상을 보고, 네모난 문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이분법의 세상은 납작하다. 늘 확실한 결론이 있고 명료하게 정리가 된다. 그건 인과의 세계일 것이고, 이성의 세계일 것이다. 반면에 감정의 세계는 입체적이며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바로 거기가 내가 사는 곳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해 오히려 화를 내고, 칭찬을 들으면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좋아한다는 말을 좋아했다는 과거형으로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사는 곳. 인과로 설명될 수 없는 많은 것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그 세계는 풍부하다. 


스스로를 납작한 세상 사람이라고,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내 안의 모순을 제거하고 억눌러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아니 모든 사람이, 풍부한 세상에 속한 존재임을 안다. 무척이나 입체적인 이 세상은 온갖 감정들로 들끓고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그걸 딱히 나쁘다고 볼 수 없다. 세상은 원래 그러한 것이다. 필요에 의해 등장한 수학과 이성과 합리는 어쩌면 인간과 그것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대한 반증일 지도 모른다. 애초에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였다면 '합리'를 강조하는 학문이 굳이 등장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그 날의 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저 날 했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원래 그런 거야'라는 현상에 대한 서술이 '그러니까 그게 옳은 거야'라는 가치 판단 진술로 덩치를 불리지 않도록 경계하는 건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완벽해야만 해'라는 문장에 집을 지어놓고 살며 가끔 그 문장 밖으로 삐져 나오는 나의 욕망과 감정에 망치질을 해왔던 나로서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원래 그런 거야'는 나에게 성큼 다가와서는 내 손에서 망치를 빼앗아 멀리 던져버렸고, 내가 어설프게 지어놨던 '완벽해야만 해'라는 집도 허물어버렸다. 처음엔 좀 허무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홀가분해졌다. 


'완벽해야만 해'라는 집이 사라지고 나자 실수와 실패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실수와 실패가 당연한 것이 되고 나니, 실수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대견하고 기특한 것이 되었다. 완벽이 당연한 것이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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