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댑테이션>을 보고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쓴 영화 <어댑테이션>을 봤다. <어댑테이션>은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광기로 번뜩이는 눈을 하고 유령난초를 찾아 헤매는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서 자신에게 결락된 열망을 보는 여자. 공허한 마음을 끌어안고 살던 여자는 남자를 보며 자기 안에서 꿈틀대는 열망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열망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
그 열망으로 남자를 읽어나가던 여자는 남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유령난초에 조금씩 의문을 품게 된다. '유령난초가 정말 존재하는 난초이긴 한 걸까?', '그건 그저 남자가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환상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유령난초를 보여달라 말한다.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못보여줄 것 없다며 늪지대로 여자를 데려간다. 늪지대를 헤매고 또 헤매지만 남자는 결국 유령난초를 찾아내지 못한다. 길을 잃은 남자는 차갑고 무겁게 젖은 몸으로 털썩 주저앉는다. 혼자였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지금까지 몇 번이고 경험해왔을 순간이 견딜 수 없이 초라하다. 여자는 남자를 측은하고 안쓰럽게 바라본다. 여자의 그 시선이 남자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늪지대에서 남자는 해시계를 만들겠다며 막대기를 세우려 한다. 밑천이 바닥난 노름꾼, 한 번 시작한 거짓말에 이제는 둘러댈 말조차 바닥난 아이의 모습 같은 것이 겹쳐보인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질책하지 않는다. 여자는 그저 유령난초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여자가 쓴 글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 인생에는 유령 난초가 널려 있다. 상상 속에서 사랑에 빠지면 멋지지만 어차피 그건 허무한 환상일 뿐, 손에 넣지 못한다. ]
첫 번째 덩어리가 논픽션 소설 <난초도둑> 속 인간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라면, 두 번째 덩어리는 그 소설을 영화화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찰리 카우프만의 이야기이다.
찰리 카우프만은 논픽션 소설 <난초도둑>의 영화 각색을 맡게 된다. 아름다운 책이라 생각하며 막상 일을 맡긴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각색해야 할지 막막하다. '소설의 각색'이라는 구멍을 통해 그의 막막함이 터져나오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덩어리에서는 '각본가'로서의 찰리 카우프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결정적 사건이 없는 밋밋한 이야기는 영화화 할 수 없는 걸까? .. 등의 구체적인 고민을 통해 각본가의 고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난초도둑>이라는 책에 그려진 식물과 동물의 협업에 대한 경이로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아주 단순한 구조의 세포로부터 온갖 모습으로 분화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 등 무언가를 쓰기 위해 꼭 전제되어야 하는 '경탄'과 그 경탄의 순간을 음미하는 찰리의 모습도 재밌다.
<해피 플라이트>가 한 대의 비행기를 띄우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영화라면, <어댑테이션>의 이 두 번째 덩어리는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각본가의 노력에 대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덩어리가 논픽션 소설 <난초도둑> 속 인간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라면, 두 번째 덩어리는 그 소설을 영화화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찰리 카우프만의 이야기이며, 세 번째 덩어리는 고군분투 끝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인간 찰리 카우프만의 이야기이다.
마음대로 각색 작업이 진행되지 않자 찰리는 막막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가 느끼는 막막함의 원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그 자신'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의 낮은 자존감. 찰리 카우프만은 업계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네임드 작가지만 그런 직업적 성취와 무관하게 그는 매 순간을 피곤하고 고달프게 살아간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없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는 것치고는, 그러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스트레스를 쉽게 받는 것치고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조언을 경청하는 등의, 그러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위안은 쉽게 얻지 못한다.
찰리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아주 극단적인 구석이 있다. 일단 그는 스스로에 대한 짙은 모멸감을 갖고 있는데 이 모멸감은 그가 가진 높은 기준에서 생겨난 것이다. 찰리의 높은 기준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향하기도 한다. 찰리는 타인을 사기꾼이나 바보 취급하며 쉽게 경멸하는 한편, 범접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타인을 우러러 보기도 한다. 이런 극단적 구석을 갖고 있는 영화 속 찰리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경멸과 숭상을 오가는 그의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아서. 그렇기 때문에 찰리의 찌질함과 울적함은 내 것이기도 하다.
찰리는 낮은 자존감의 원인을 볼품없는 외모에서 찾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 밖 찰리는, 영화 속 찰리의 막연한 짐작에 대한 선명한 반례를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찰리의 쌍둥이 동생 도날드. 도날드는 찰리와 똑같이 생겼지만 성격은 전혀 다르다. 그는 형의 성취를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할 줄 알고, 형이나 엄마의 의견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 들인다. 자신이 알고 싶은 분야에 대해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전문가의 세미나에 참석한다. 찰리에게 타인은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그래서 가급적 피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도날드에게 타인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존재다. 그래서 도날드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어와 약물중독자를 피해 늪지대에 웅크린 두 형제는 같이 밤을 지새웠다. 찰리는 그날 밤 자기가 늘 한심하게만 생각했던 동생에게서 자신에게 결락된 항체를 가진 동생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항체는 바로 '누구도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없어. 그게 설령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지라도.'의 마음이다. 이 마음 덕분에 도날드는 늘 자기 편으로 살아갈 수 있고, 이 마음 덕분에 도날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로부터 쉽게 회복될 수 있다.
그 마음은 스스로의 완벽함을 믿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의 마음과도 거리가 멀다. 그 마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마음인 동시에 그 부족함에 대해 '괜찮다' 말해주는 마음이다. 스스로에게 '괜찮다'라 말해줄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 도전할 수 있고, 계속 도전하는 한 우리는 미약하게나마 달라질 수 있다. '괜찮다'라 말해주지 않는 마음은 우리의 고군분투를 변위로 측정한다. 같은 곳을 맴돌 뿐인 우리의 초라한 매일은 낙제점을 면치 못한다. '괜찮다'라 말해주는 마음은 우리의 고군분투를 이동거리로 측정한다. 같은 곳을 맴돌 뿐인 우리의 초라한 매일도 '괜찮다'는 포옹 속에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다.
내 마음에 쿵 와 닿은 세 가지 주제 모두 굵직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하나의 영화에 버무린 것만 해도 대담한데, 그 와중에 유머마저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밌게 봤다. 깔끔하게 정돈된 영화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참 좋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