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갓 헬프 더 걸>을 보고
<갓 헬프 더 걸>을 봤다. 영화를 보고 나니 마음이 잔뜩 말랑말랑해진 게 느껴졌다. 말랑거리는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렸는데 그건 참 좋은 흔들림이었다. 너른 잔디밭에 따뜻한 햇빛과 함께 누워 있으면 느낄 수 있는, 손목과 발목을 간지럽히는 작은 풀들의 흔들림 같은 것. 외줄 위에서 느끼는 불안한 흔들림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
그리고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잡아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내가 몇 년 뒤에 이 영화를 봤다면 지금의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싶어서. 이 영화는 내가 더 이상 돌보지 않는 마음 한 귀퉁이에 부딪쳐서 작은 파문을 만들어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래서 내 마음 한 구석에 있는 그 작은 물웅덩이의 물이 모두 말라버린 뒤에 이 영화가 와서 부딪쳤다면, 나는 이 긴 여운의 파문을 볼 수 없었으리라.
이 영화는 불안한 이브와 찌질한 제임스와 해맑은 캐시가 함께 밴드를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서사구조나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그것보다 더 좋았던 것은 음악과 여백이었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밴드가 되어 어떤 음악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화소보다는, 이브와 제임스가 하루 종일 걸어다니는 장면, 이브와 제임스와 캐시가 카누 아니 카약을 하며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좋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려 애쓰고, 그렇게 읽어낸 마음을 토대로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해줘야 하는 피곤한 사교는 거기에 없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 앞에 서고,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완성형의 인물이 미완성의 인물을 끌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행형의 인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이야기.
제임스는 음악을 사랑한다. 소심해 보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노래에 야유를 보내도 그닥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담고 있는 목표가 너무 커서 그런지, 한 발 떼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 당일치기 여행을 하며 흥이 오른 캐시가 말한다. "야, 우리 지금 완전 밴드 같지 않니?!" 산통 깨기 선수인 제임스는 말한다. "우린 그냥 배 타고 노 저은 것뿐이야. 밴드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아." 이브는 그런 제임스에게 묻는다. "그럼 밴드는 어떻게 만드는 거야?" 제임스는 선문답을 하듯 분위기를 내며 말한다. "우리가 밴드를 만드는 게 아니야. 밴드가 우리를 만드는 거지."
제임스는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걱정도 많다. 위대한 음악은 이미 다 만들어진 걸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새로운 밴드를 하는 것에 겁을 내다가도, 1969년 이후로 팝은 죽어가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제임스의 이야기를 듣던 이브는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는 듯 캐시에게 묻는다. "쟤 뭐래는 거니?" 잔디밭에 누워 제임스의 말은 듣고 있지도 않던 캐시가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고는 제임스에게 쏘아붙인다. "난 이브랑 밴드 할 거야. 너도 같이 하든지 아님 저기 가서 지금처럼 궁상이나 떨든지!" 그렇게 그들은 굴러가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찰떡궁합이었던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친구-되기의 장면은 언제 봐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래서 더더욱, 친구-되기 이상의 희망적인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앵글 일부를 다른 피사체가 크게 가린 채 촬영한 화면이 꽤 있는데, 옆에 숨은 채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리고 굉장히 밝거나 굉장히 어둡거나, 또 저물기 시작한 황금색의 햇빛 같은... 빛이 예쁜 장면들이 많아서 그것도 좋았고, 그 예쁜 장면들과 함께 흐르거나 그것들을 이어 주는 매듭 역할을 하는 음악 역시 좋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를 빌어 '당신은 시詩예요.'라는 말을 건네고 싶어지는 영화다. 이 영화는 모든 게 꽉 짜여서 타이트하게 굴러가는 톱니바퀴보다는 여기 저기 드문 드문 별이 박혀 있는 밤하늘이 연상된다. 우리는 그 별을 이어 온갖 것을 그려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