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방울비

그러니까 나는 너를 보살펴 줄 거야

by 둥글레

두더지굴에서의 첫날밤은 무척 평화롭게 지나갔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걸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간의 긴장과 피로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이불 속에서 꼼짝 않고 누운 채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을 살폈다. 어젯밤엔 너울대는 촛불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겨 촛불이 유일한 조명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이 곳 저 곳에 조명등이 달려 있었다. 흰색의 빛을 자연스럽게 내뿜고 있는 작은 조명들. 그러고보니 어젯밤엔 공간 전체가 은은한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밝음'만 남아 있을 뿐 특별한 색조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보다는 한층 더 밝아진 공간을 구석 구석 살펴봤다. 내 이부자리 왼편에 있는 벽은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여행지에서 보낸 엽서나 직접 그린 그림 같은 것들. 한 사람의 수집품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스타일이 전부 제각각이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었다. 벽을 채우고 있는 소품 중에는 알록달록한 털실에 동그란 구슬 여러 개를 꿰어서 만든 것들도 있었는데, 그런 털실 여러 개가 나란히 매달려 있는 모습이 마치 구슬을 꿰어 만든 커텐 같아 보였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두더지굴 전체를 훑어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좌식 테이블. 테이블 주변에는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를 비롯해서 푹신푹신해 보이는 쿠션과 동그랗게 말아놓은 담요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커다란 가구가 없어서 공간은 꽤나 널찍해 보였지만 황량함이나 삭막함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것도 자기 공간에 들이지 않겠다는 고집보다는, 자기 아닌 누군가 혹은 내 것 아닌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비워둔 것 같은 배려가 느껴졌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간이랄까. 이 곳 저 곳에 놓여 있는 작은 소품들마저도 이 공간의 주인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사람이 아니라 두더지지만.


좌식 테이블 너머로 분주하게 부엌일을 하고 있는 두더지가 보였다. 정갈하게 칼질을 하다가도 중간에 냄비 뚜껑을 열어 맛을 보고 이런 저런 재료를 집어 넣기도 하는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두더지가 해 주는 아침밥이라니.. 온갖 벌레들을 모아서 끓인 스프를 주면 어쩌지? 잠깐, 혹시 어제 마신 주스도 그렇게 만든 거 아냐? 불안과 걱정이 다시 머리를 쳐들었지만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어'의 힘을 빌어 그것들을 떨쳐냈다. 내가 불안과 걱정을 몰아내는 동안 두더지는 커다란 테이블에 한 끼 식사를 뚝딱 차려냈다.


"밥 먹자." 간밤에 잠은 잘 잤는지, 혹시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묻는 대신 대뜸 밥 먹자고 말해주는 두더지가 고마웠다. 손님으로 초대 받은 게 아니라 본가에 온 것만 같아서. 헌데 잘 차려진 밥상을 보고 난 뒤에는 정말 집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윤기가 도는 흰 쌀밥에 계란말이와 고사리, 그리고 김치찌개. 하나 같이 내가 좋아하고, 하나 같이 내가 자주 먹던 것들이었다.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 먹었는데 엄마가 끓여주던 김치찌개 맛과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어? 김치찌개에 참치를 넣었네요?" "응, 네 기억을 빌렸어. 나도 김치찌개에 참치 넣은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런데 은근 맛있네?" 이번이 처음이라는 건.. 혹시? "아, 그럼 예전에도 김치찌개를 끓인 적이 있어요?" "당연하지. 김치찌개는 꽤나 많은 사람의 소울푸드거든. 첫날 아침으로는 가급적 그 사람의 소울푸드를 차려주는 편이야. 앞으로는 이 곳을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라는 내 나름의 인사랄까?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내요.'라는 말로 슬쩍 때우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런 말 들으면 괜히 더 불편하지 않아?" 두더지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지만 나는 숟가락을 문 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는 이 곳을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라니. 얼마나 더 오래 이 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말수가 적어진 나를 힐끗 쳐다 본 두더지는 경쾌하게 말했다. "다 먹었어? 그럼 치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두더지는 빈 접시를 빠르게 치워냈다. 옆에 있던 쿠션을 끌어 안고 멍하게 앉아 두더지가 설거지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밥까지 차려주셨으니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정도의 예의는 차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 있고 싶었다. 저 두더지라면 날 이해해 줄 거야.


"자, 그럼 소화도 시킬 겸?" 두더지는 커다란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페트병 뚜껑과 작은 천과 종이 조각, 온갖 무늬의 마스킹 테이프와 알록달록한 털실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 이거 혹시..?" 알록달록한 털실을 들고 두더지를 쳐다보자, 두더지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걸로 만든 거야. 저 방울비." "아, 페트병 뚜껑으로 만든 거구나. 구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거 이름이 방울비에요?" "응, 내가 지었어. 길다란 줄 하나에 동그란 애들이 방울 방울 맺혀 있잖아. 그리고 그 길다란 줄 여러 개가 빗줄기처럼 쫙 늘어져 있고 말야."


두더지는 페트병 뚜껑의 평평한 부분에 작은 천 조각을 잘라 붙인 다음 뚜껑 두 개를 서로 마주보게 했다. "움푹 들어간 부분끼리 마주보게 한 다음 맞물린 부분을 마스킹 테이프로 감아주는 거야. 그러면 완성! 가끔은 가운데 빈 공간에 방울 같은 걸 집어 넣은 다음 붙이기도 해. 그럼 흔들릴 때마다 예쁜 소리가 나거든."


우리는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페트병 뚜껑 하나 하나에 어울리는 예쁜 옷을 입힌 다음, 어떤 옷을 입은 아이들끼리 붙어 있어야 어울릴까 고민하며 짝을 지어줬다. 어울리는 짝을 찾아주는 게 지겨워질 즈음에는 제일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끼리, 그러니까 한자가 프린트 된 신문지를 입은 아이와 핫핑크의 광택 비닐 필름을 입은 아이 둘을 붙여 주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막상 붙여 놓면 다들 그럭저럭 어울렸다. '이 조합은 진짜 이상하겠지?'와 '어? 의외로 괜찮네?'의 연쇄를 겪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어떤 조합이든 소화해 내는 페트병 뚜껑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의외로 괜찮네?'가 천천히 싹텄다.


"있잖아, 나는 말이야. 세상에서 버려진 것들을 보살피는 게 좋아. 아주 조용한 밤에는 방울비 속에서 쟤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게 들리기도 해. '이렇게 꼭 끌어 안고 있는 거 너무 좋지 않니?', '난 페트병 없이 이렇게 우리끼리만 독립한 게 진짜 꿈만 같아. 그 동안은 사실 우리가 그저 페트병에 딸린 부속품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거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땐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 두더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도 괜히 뿌듯해져서 내 앞에 쌓인 방울들을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펴봤다. 테이핑이 헐겁게 된 부분은 없는지, 조금 더 단단하게 붙여줘야 할 부분은 없는지. 방울에 시선을 고정한 나를 바라보며 두더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보살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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