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곳이라면 진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아
어둡고 좁은 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길을 걷는 와중에도 '갑자기 우물이 무너져 산 채로 매장당하면 어쩌지?'하는 불안함을 느끼기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속 편한 생각을 더 많이 했는데, 내 안에서 '어떻게든 되겠지.'를 만난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어떻게든 되겠지.'를 찬찬히 살펴보니 그 뒤에는 이런 생각이 숨어 있었다. '갑자기 우물이 무너져도 괜찮아. 두더지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그건 바로 두더지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니, 그런데 내 마음 속에 언제 이런 믿음이 싹튼 거지?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의 이 기괴한 상황을 해설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저 두더지라는 것. 그 두더지가 지금 나를 어떻게든 도우려 한다는 것.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두더지가 준 손전등으로 어둠을 몰아내며 걷는 동안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 곳에 있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동안은 두더지 말을 잘 듣자고, 두더지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내 마음 속 블랙홀 위에 내려앉은 연꽃이 바람에 천천히 살랑댔다. 커다란 연잎이 괜찮아, 괜찮아 하며 블랙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다정한 손길에 취한 블랙홀은 아기처럼 잠이 들었다. 모든 걸 빨아 들이기를 멈춘 블랙홀은 그저 검푸른 호수처럼 보였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은 갑작스레 끝이 났다. 여기 어디에 길이라는 게 있었냐는 듯, 커다란 바위가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조금 걱정은 됐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두더지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두더지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바위 사이 틈을 찾아서 그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나도 두더지를 따라 그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렇게 바위 사이 틈을 통과하자 놀랄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며칠간 쪼그리고 잠을 청했던 우물 바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널찍한 공간이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우물 바닥과 달리 이 곳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비에 젖은 낙엽 냄새가 가득하던 우물 바닥과 달리 이 곳은 향기가 가득했다. 상큼한 자몽향과 달콤한 바닐라향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것 같았는데,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는 것만으로 온몸이 노곤해지는 좋은 향이었다. 두더지가 잠은 편하게 자야 한다며 나를 이 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래, 이 곳이라면 진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아.
촛불이 흔들리며 우물벽에 그려내는 그림자가 근사했다. 여기 저기 푹신한 쿠션이 몇 개나 나뒹굴고 있었고, 구석에는 제법 커다란 냉장고마저 놓여 있었다. 냉장고가 있다는 건 전기를 쓸 수 있다는 건데.. 아니 대체 어떻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더지가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줘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나는 그 두 가지 태도 중에서 일단 그 어느 것에도 놀라지 않기를 선택했다.
이 아늑한 공간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었지만 좋은 향이 맴도는 안락한 방을 보니 일단은 눕고 싶었다. 이번에도 내 마음을 앞서 읽은 두더지는 포근한 이부자리를 깔아주었다. 두터운 이불을 턱까지 잡아 올려 덮었다. 살갗에 부딪치는 이불의 바스락거림이 좋았다. 이게 대체 얼마만에 덮어보는 이불이지? 찬 바닥에서 웅크리고 잠들었던 지난 며칠의 피로가 새삼스레 밀려왔다. 눈꺼풀에 매달린 졸음과 싸우며 두더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꼼꼼하게 지워낸 두더지는 꽃무늬 원피스를 벗고 줄무늬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부산하게 냉장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모든 움직임에 활력이 가득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칼질을 하던 두더지가 문득 나를 돌아봤고, 가물거리는 눈으로 가물치가 되기 직전인 나와 눈이 마주쳤다. 두더지는 물이 묻어 있는 손을 앞치마에 대강 닦고는 그 작은 손으로 내 머리맡에 놓여 있던 기계를 분주하게 만졌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뒤 스피커에서 자장가용으로 편곡된 비틀즈가 흘러나왔다. 아아, 이걸 어떻게 버텨. 결국 노곤함의 파도에 저항하는 걸 멈추고 그냥 허물어지기로 했다. 체념한 듯 눈을 감는 나를 두더지가 웃으며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눈 뜨고 일어나면 집이 아니라 이 곳이겠지? 그런데 이번엔 그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얼른 자고 일어나서 이 곳을 구석구석 구경해야지. 두더지의 손님맞이가 어색하지 않던데 나 말고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오리, 아니 다른 존재가 이 곳을 찾은 적이 있는지 물어봐야지. 그 존재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물어볼 거야.' 내일을 기대하며 잠드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두더지의 규칙적인 칼질 소리와 동그란 실로폰 소리가 연주하는 <If I fell>이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