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손전등

괜찮아, 모든 걸 혼자 해결할 필요는 없어

by 둥글레

한참을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 보니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여기에 들어와서 한 거라곤 잔 거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계속 졸린 걸까. 두더지가 만들어 준 주스에 수면제라도 들어 있던 걸까. 꾸벅 꾸벅 졸다가 나란히 앉아 있던 두더지 어깨에 머리를 콩 찧었다. 민망함에 슬쩍 눈치를 보는데 두더지가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따라와. 잠은 편하게 자야지."


'어디를 따라오라는 거지? 이게 우물 바닥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가?' 살짝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두더지를 믿어 보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이 곳에서는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나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니까. 작은 두 손을 우물벽에 딱 붙인 채 옆으로 천천히 걷던 두더지는 주변의 벽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 평범한 벽 앞에 멈춰섰다. 두더지가 예의 그 작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벽돌을 매만지자 쿠궁-하는 소리가 나며 우물벽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두더지는 그 틈으로 쏙 사라져버렸다. 두더지를 따라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어 보기는 했지만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새카만 어둠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 곳에 섣불리 발을 내딛었다가는 산 채로 어둠에 먹혀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물 바닥에 주저 앉은 채 틈 사이에 귀를 대 보니 점점 멀어져 가는 두더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래, 괜찮을 거야. 한 번 시도해보자. 어둠이 정 무서우면 아예 눈을 감고 걸으면 되지.'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진 뒤 좁은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은 뱀처럼 혀를 낼름대며 나를 반겼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맑은 날의 푸른 잔디밭을 상상하며 걸어보려 했지만, 뱀이 된 어둠이 내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쉽사리 발을 뗼 수 없었다. 벽에 딱 붙은 채 발을 끌며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끌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손은 나를 다시 우물 바닥으로 끌고 나왔다.


바닥에 드러누워 가쁜 숨을 안정시킨 후 천천히 눈을 뜨니 코 끝에 안경을 올린 두더지의 얼굴이 보였다. '아, 나 때문에 애써 가던 길을 되돌아 왔구나.' 미안한 마음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 떠들어댔다. "혹시 저 때문에 되돌아 오신 거예요? 에이, 괜찮은데. 눈 감고 잔디밭 상상하면서 걷고 있었거든요."


두더지는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물었다. "어두운 거 무서워해?"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눈 감고 밝은 곳을 걷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걷고 있었거든요." 두더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계속 바라봤고, 나는 목소리를 높여 말을 보탰다. "눈을 뜨고 어둠 속을 걷는 건 어렵지만요. 밝은 곳을 걷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눈을 감고 걸으면 그나마 걸을만 해요. 신기하지 않나요? 둘 다 어둡긴 마찬가지인데 말예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두더지는 크로스백에서 손전등 하나를 꺼내서는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자, 어때? 이게 있으면 굳이 잔디밭 같은 걸 상상할 필요도 없겠지?"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애꿎은 손전등만 만지작댔다. 두더지는 몇 마디의 말을 더 보탰다. "무서우면 그냥 무섭다고 말해. 그래도 괜찮아. 내가 이렇게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 모든 걸 혼자 해결할 필요는 없어!"


두더지는 까치발을 하고 내 어깨를 두드려 준 다음 다시 틈 사이로 쏙 들어갔다. 나도 두더지를 따라 그곳으로 발을 내딛었다. 뱀 같은 어둠이 입맛을 다시며 나에게 다가왔지만 나는 두더지에게 받은 손전등으로 그것들을 전부 내몰았다. 손전등과 함께 꼬불꼬불한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조금 전 두더지가 해 준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무서우면 그냥 무섭다고 말해. 그래도 괜찮아. 내가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잖아. 모든 걸 혼자 해결할 필요는 없어.


손전등에 의지해 어두운 길을 걷는 동안 '그래도 괜찮아'와 '모든 걸 혼자 해결할 필요는 없다'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내 안으로 날아왔다. 두 마리의 나비는 겁도 없이 내 마음 속 블랙홀에 조용히 내려 앉았다. 나는 이제 곧 블랙홀이 으르렁대며 나비의 연약한 날개를 산산조각 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웬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마리의 나비는 블랙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연꽃이 되었다. 크게 부풀어오른 녹색의 연잎이 검은 호수에 색채를 더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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