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두더지? 두더지!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무룩했다.

by 둥글레

언제나처럼 태양이 떠 있기를, 그래서 언제나처럼 출근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긴 잠에서 깼다. 하지만 눈을 뜨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여전히 그 우물 바닥이면 어쩌지, 여전히 내가 오리면 어쩌지. 그렇다고 영영 눈을 감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눈을 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우물 바닥 특유의 축축한 어둠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이 곳은 여전히 우물 바닥이고, 나는 여전히 오리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나는 계속 잤다. 잠에서 깰 때마다 조심스레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축축한 어둠만 보일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계속 잤다.


"잠깐 일어나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 대신 발견한 게 있다면 머리맡에 놓인 정체 모를 음료수 한 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기나 갈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음료수를 보고 나니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마셔도 돼. 너 주려고 만든 거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이번에도 내 생각을 앞섰다. 낯선 이가 건네 준 정체 모를 음료를 덥석 마시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지만 그런 건 평범한 인간의 상식일 뿐이다. 우물에 빠진 오리에게 그런 상식은 필요없어. 나는 허겁지겁 음료수를 마셨다.


음료수는 생각보다 달콤했다. 입 속을 맴돌 때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시원했지만, 목구멍을 넘어간 이후로는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음료수 덕에 기력을 찾은 걸까, 아니면 어둠에 한층 더 익숙해진걸까. 조금 전에 비해 눈이 한층 더 밝아진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인사를 건넸다. 꽥꽥 거리는 오리 소리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된 의미를 담은 인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스는 마실만 했어?" 아, 이 음료수의 정체는 주스였구나. "네, 너무 맛있었어요." "다행이다."


저 목소리는 이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있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우물 바닥에서 신기하고 맛있는 주스도 뚝딱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면 이 꿈에서 깨는 방법을 알려줄 지도 몰라. "저기, 어디 계세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을 불사르기 위해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괜찮으시면 얼굴 좀 보여주세요." "...벌써?"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너무 빠른데.. 보통 주스를 두 번은 먹고 나서야 나를 찾던데. 이상하네." 중얼중얼 혼잣말이 들려온 곳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두더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 두더지? 두더지!


코 끝에 돋보기 안경을 걸친 두더지는 작은 두 손으로 연신 곱슬머리를 매만지며 머리 끝에 볼륨을 불어넣고 있었다. "오늘 만날 줄 알았으면 미용실이라도 다녀왔을 텐데." 두더지는 바쁘게 머리를 매만지면서도 혼잣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정도 머리를 매만진 두더지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화려한 꽃무늬가 인상적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 위로는 짙은 분홍색의 미니 크로스백을 앙증맞게 메고 있었다. 원피스 주름 정돈을 마친 두더지는 크로스백에서 분홍색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위아래 입술을 음파 음파 부딪치는 것으로 그 모든 과정을 마무리한 두더지는 그제서야 나를 쳐다보았고, 아까부터 두더지를 쳐다보고 있던 나와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으악!" 이건 두더지의 비명. "으악!" 이건 두더지의 비명 소리에 덩달아 놀란 나의 비명. "너,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머리 매만지실 때부터요." "이상하네. 벌써 나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되게 잘 보이는데요?" 무방비로 놀라는 모습을 나에게 보인 게 겸연쩍은지 두더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침묵을 깨는 건 나의 몫. "못본 걸로 할게요."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두더지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벌써 다 봤잖아.." 두더지는 침울하게 대답하면서 크로스백을 뒤적댔다. 그리고는 커다란 주스 한 팩을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렇게 큰 걸 어떻게 저 작은 가방에서 꺼낸 거지? 신기하긴 했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뭐, 도라에몽의 먼 친척이라도 되나보지. 우물에 빠진 오리가 되어 립스틱 바른 두더지랑 얘기하고 있는 판국에 일일이 놀라는 것도 새삼스럽다. "원래대로라면 넌 이걸 한 번 더 마시고 나를 봤어야 해." 나는 주스팩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 마셨다.


단숨에 주스를 들이킨 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눈을 떠 두더지와 눈을 마주치고는 이렇게 말했다. "앗 깜짝이야! 당.. 당신은 누..누구세요?" 어색하기 그지 없었으나 내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였다. 초면에 이러는 건 좀 부끄러웠지만 주스도 얻어 마셨으니 이왕이면 두더지의 장단을 맞춰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더지의 반응은 예상 외로 차가웠다. "그게 뭐야. 완전 어색해. 연기 빵점이야." 생각처럼 멋지게 등장하지 못한 두더지는 여전히 시무룩했고, 나름 용기를 내서 호의를 베풀고도 혹평을 들은 나도 시무룩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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