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여긴 우물 바닥이야."
한참을 자고 일어나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이 멀어버린 걸까, 아니면 태양이 갑작스레 빛을 잃어버린 걸까. 조금이라도 다행스러운 해석을 채택하기 위해 두 개의 가능성을 견주어보다가 이내 그만뒀다. 전속력으로 최악을 상상하는 버릇이 생긴 이후로 나는 '그래도 다행이야.'라는 생각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안 좋은 쪽으로 치우쳐버린 마음의 균형을 어떻게든 잡아보려는 무의식적 노력일 거라 짐작하면서도 나는 '그래도 다행이야.'에 대한 나의 집착이 못 견디게 싫었다. '그래도 다행이야.'라는 말에는 내가 처한 상황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었으니까. 나의 정당한 분노와 슬픔은 '그래도 다행이야.'라는 말이 내 안에서 울려퍼질 때마다 갈갈이 찢겨나갔다.
자고 일어났더니 갑작스레 앞이 보이지 않는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오늘이 화요일이며 오전 10시에 중요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회사에 연락을 해야 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아서, 혹은 태양이 빛을 잃어서, 아니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 사실이든 오늘 출근은 못할 것 같다고. 하지만 자기 전에 늘 머리 맡에 두는 휴대폰의 행방이 묘연했다. 눈을 감으나 뜨나 별반 차이 없는 캄캄한 어둠 속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아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둠 속에서 내가 휴대폰 대신 발견한 게 하나 있다면 내 손가락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위화감이었다.
불현듯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가 떠올랐다. 가족을 위해 근면성실하게 일하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이 벌레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레 닥친 불행 속에서도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분노하기보다는 회사에 출근할 수 없음을 걱정했다. 책을 읽으면서는 그레고르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정작 내가 그 상황에 놓이고 나니 나 역시 그레고르가 그랬던 것처럼 당장의 출근을 걱정하고 있다. 어쩌면 나 역시 그레고르처럼 하루 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버둥대고 있는 거대한 벌레를 상상했다. 나의 끼니를 챙겨 줄 여동생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내 등에 사과를 박아넣을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 나는 이렇게 또 하나의 다행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걸까?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어둠과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어둠의 빛깔이 달랐다. 어둠에 마비되었던 촉각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이 곳의 축축함과 서늘함이 느껴졌다. 미약하게나마 돌아온 시력을 이용하여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바닥 여기 저기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밧줄에 매달린 양동이 하나가 구석에 뒹굴고 있었다. 돌을 쌓아 만든 탄탄한 벽이 내 주위를 높게 감싸고 있었는데, 하늘과 벽이 맞닿은 틈으로부터 약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희끄무레한 덩어리처럼 보이던 빛이 조금씩 자기의 윤곽선을 드러냈다. 어둠에 익숙해진 뒤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한 눈을 이용하여 나는 몇 가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첫째, 내 머리 위에 동그란 구멍 하나가 있다. 둘째, 바로 그 구멍으로 바깥 세계의 빛이 스며 들어오고 있다. 셋째, 이 곳은 서늘하고 축축하다. 그 때 밧줄에 매달린 양동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꼭 두레박 같은데.. 그렇다면 이 곳은?
"맞아, 여긴 우물 바닥이야." 어디에선가 들려온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앞질렀다. 갑작스레 등장한 목소리에 나는 무척 놀랐다. "너는 지금 우울이라는 이름의 우물에 빠져 있는 거야." 우울이라는 이름의 우물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말장난을 제법 좋아하는 사람이 지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에 웃을 수 있는 내가 낯설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머리를 긁적여보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 떨어지며 손가락이 전부 부러져버린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픔은 전혀 없는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내 손을 내려다봤는데 거기에는 웬 회색의 털뭉치가 있었다. 손을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자 털뭉치 역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몇 번의 추가 실험을 통해 그 털뭉치가 내 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에 비하면 그나마 내 신세가 좀 나은 걸지도 몰라. 나는 지치지도 않고 또 하나의 다행을 찾아냈다.
"넌 지금 오리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분명히 듣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오리라고?' 마음 속으로 되묻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응, 우울이라는 이름의 우물에 빠져 버린 오리. 그게 지금의 너야." 터무니없는 꿈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꿈에서 깨려면 잠에서 깨어야 하고, 잠에서 깨려면 먼저 잠이 들어야 한다. 그러니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건 얼른 잠이 드는 것.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몽롱해지는 와중에도 이 모든 게 꿈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처럼 태양이 떠 있을 것이고, 나는 언제나처럼 출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