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만 나도 여기 이렇게 커다란 구멍이 있어."
내 마음 속 블랙홀은 사랑이나 희망이나 꿈 같은 것들, 그러니까 잘 마른 햇빛 냄새가 나는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것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눅눅한 슬픔과 축축한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은 금세 정글이 되었고, 나는 햇빛 한 톨 스며들지 않는 그 어두운 늪지대를 엉금엉금 기어다녀야만 했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마음 속을 기어다니는 동안 나는 내내 불안하고 슬펐다. 악어떼가 언제 나타날까 예상할 수 없어 불안했고, 낯설게 변해버린 내 마음을 마주하는 게 슬펐다.
불안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빌딩 숲 사이를 걸을 땐 금방이라도 누군가 투신할 것 같다는 불안함에 주위를 두리번대며 걸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땐 당장이라도 큰 불이 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매번 비상구의 위치를 확인했다.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릴 땐 뒷짐을 진 채로 벽에 등을 딱 붙이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건 두 가지 가능성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누군가 갑자기 나를 선로 밖으로 밀어낼 가능성과 내가 갑자기 누군가를 선로 밖으로 밀어낼 가능성.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 때문에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아직 이성의 끈을 쥐고 있는 나는 확률을 이야기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되겠니? 1퍼센트도 안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이야기가 통할 리 없지. 불안에 잠식된 세계를 지배하는 건 고장난 확률이니까. 불안에 잡아먹힌 나는 눈을 무섭게 빛내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내가 상상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50퍼센트야.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거나.'
금방이라도 닥칠 것 같지만 끝내 닥치치 않는 온갖 종류의 불행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다보면 정신이 버텨내지 못한다. 한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아무 일 없는 하루'가 기적처럼 다행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버릇처럼 '최악의 순간'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빗나갔다는 것에 안도하며 살아가는 게 내 몫으로 배당된 인생이라면 나는 그걸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었다. '더 나은 순간'을 꿈꿀 수 없다면 인생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나에게 인생이란 시궁창에 누워서도 푸른 초원을 상상하는 것이어야 했다. 시궁창에 대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인생은 사치다. 그런 사람은 인생을 살 자격이 없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두려웠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예상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으며, 낯설기까지 한 내가 죽음만큼이나 두려웠다. 비가 지나간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두려움이 지나간 마음에 믿음이 싹튼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게 쉽게 끝날 이야기였다면 굳이 시작할 필요도 없었겠지. 비가 지나간 하늘에 무지개 대신 찾아온 건 엄청난 한파였고, 두려움이 지나간 마음에 믿음 대신 찾아온 건 끝없는 슬픔이었다.
하루 종일 을씨년스럽게 비가 오는 날에는 날씨마저 우중충한 게 슬펐고, 눈이 시릴 정도로 하늘이 파란 날에는 이 세상에 우중충한 것이 오직 내 마음뿐인 것 같아서 슬펐다. '차분하게 슬픔의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들을 하나 둘 해결하다 보면 이 끝없는 슬픔도 어쩌면 조금씩 사그라들지 몰라.' 그런 희망을 품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하나 둘 적어봤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리스트를 적을 기세로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슬프게 느껴진다면 마음의 병을 의심해봐야 한다. 한 번 슬픔에 젖은 마음은 모든 것에서 슬픔을 보기 마련이니까.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나는 퇴근길에 사온 도넛 하나를 접시에 덜어냈고 우유를 한 컵 따랐다. 설탕으로 끈적하게 코팅된 도넛을 집어들어 한 입 베어 먹으려는데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무렵엔 발작하듯 갑작스레 울음이 터지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 눈물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왜 하필 도넛을 먹으려던 찰나에 눈물이 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역시 그 무렵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 미스터리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아무렇지 않게 도넛을 꼭꼭 씹어 먹었다.
그렇게 도넛 하나를 다 먹고 난 후 나는 여섯살짜리처럼 바닥에 주저 앉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조금 전 조용히 흐른 눈물 한 방울의 이유도 알지 못하는 내가 갑작스레 터져 버린 울음의 이유를 알 리 없었다. 아직 입을 대지 않은 도넛 서너개가 봉투에 담긴 채 나의 흐느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도넛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은 순간을 상상할 수 없는 무력함에 대해, 죽고 싶어 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대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커다란 블랙홀에 대해. 하지만 도넛은 고개를 저으며 텅 비어버린 가슴을 내게 보여줄 뿐이었다. "미안해. 그치만 나도 여기 이렇게 커다란 구멍이 있어."
나는 도넛이 불쌍해서 또 한참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