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미어캣 아주머니

초거대 물음표의 질량을 이겨내지 못하고

by 둥글레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느낌이 어떤 건지 알아?” 두더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 마음 속에도 그런 구멍이 있는 걸요. 되게 커다랗고 되게 시커먼 구멍 말이에요. 아무리 칭찬을 들어도, 아무리 밝은 생각을 하려 해도 그 구멍으로 전부 다 빠져 나가 버려요.” “세상에는 말이야.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어.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느낌을 아는 사람이랑...” “그 느낌을 모르는 사람?” “아니, 그 구멍에 빠져 버린 사람. 여기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이야. 이 곳에서의 내 역할은 그 사람들을 보살펴 주는 거고.”


두더지는 그런 사람들을 보살펴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보여주겠다는 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는 어제의 그 주스를 가져왔다. 우리는 주스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럼 여기에 온 사람이 저 말고도 많았다는 거네요?" “물론이지. 전부 세어보진 않아서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가 갔어. 저기 벽에 붙어 있는 엽서 보여? 다 그 사람들이 보내온 거야."


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마음 속에 구멍이 생긴 건지, 그 사람들도 전부 나처럼 오리의 모습으로 이 곳을 찾아왔는지, 그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이 곳을 떠나기까지 대략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지, 그래서 결국 이 곳을 떠나갈 때 즈음에는 마음의 구멍이 깨끗하게 메워졌는지, ... 물어보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걸 물어봐도 괜찮을까?'하는 두려움이 내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우면 그냥 무섭다고 말해. 그래도 괜찮아. 내가 이렇게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필요는 없어.' 그래, 두더지가 그랬지. 어두운 바위 틈을 무서워하던 내게 손전등과 함께 건네 준 두더지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오기 전엔 여기에 어떤 분이 계셨나요?” 두더지는 내 질문을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 이야기부터 할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잘 전달이 될까 고민하던 차였거든. 이렇게 질문해 주면 나야 너무 고맙지.” 두더지는 주스를 호로록 마신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은 이 곳에 미어캣의 모습으로 찾아왔어. 네가 오리의 모습으로 여길 찾아온 것처럼 말야." "그것도 물어보고 싶었어요." 조금 전 두더지의 고맙다는 말을 듣고 가벼워진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멋대로 움직여도 괜찮아. 이제 궁금한 건 망설이지 않고 물어볼 테니까. "아, 내가 이 얘기 아직 안 했지? 여기 오는 사람들은 전부 인간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 아무래도 자기가 은연 중에 측은하게 생각했던 존재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 같더라구. 스스로에 대한 애도의 표현 같은 거 아닐까?" "저는 딱히 오리를 측은하게 생각했던 적은 없는데요." "'은연 중에'라고 했잖아. 잘 생각해보면 짚이는 구석이 있을걸? 이 얘기는 어차피 조만간 다시 하게 될 거야. 미어캣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될까?" "네, 그럼요. 궁금해요." 어느 새 머릿속에 자리잡은 측은한 오리를 지워내고 미어캣을 그려 넣었다. 차가운 우물 바닥에서 어리둥절하게 깨어난 미어캣 한 마리.


"얼핏 보기엔 되게 귀여운 미어캣이었는데 인간 나이로는 중년이었어.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둔 오십대 초반의 주부였거든. 남편이나 딸과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유독 안 좋았나봐.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떻게든 잘해보려 했는데 다 실패해버린 거야. 혹시 그거 알아? 여기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어떻게도 되지 않았을 때의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는 거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이 갑갑해졌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어떻게도 되지 않으면.. 그럼 대체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만난 적도 없는 미어캣 아주머니의 시어머니가 괜히 미워졌다.


"그러면 그 분 마음 속 구멍은 시어머니 때문에 생긴 거예요?" "아니. 그 사람이 여기 온 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난 뒤야." 두더지로부터 들은 미어캣 아주머니의 사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처음으로 불거진 건 그녀가 20대 중반 나이로 결혼을 한 직후였는데, 그 갈등은 그 후로도 자그마치 20년 넘는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무조건 복종하려고도 해 보고, 반발도 해 보고, 울면서 사정도 해 보고, 냉담하게도 대해 봤지만,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상황은 악화되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물음표들이 시끄럽게 머리 속을 돌아다니는 통에 약물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20대 중반이던 그녀는 40대 끝자락에서 그 부고를 받아 들었다. 시어머니를 떠나 보내며 미어캣 아주머니는 엄청나게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가 흘린 많은 눈물 사이에는 오직 그녀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웃음들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미어캣 아주머니는 시어머니 없는 이 세상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불면의 밤은 계속 되었다. 지금껏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은 시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시어머니만 없다면 저절로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해결되지 않는 물음표가 그녀의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나며 그녀의 머리 속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물음표들은 하나 둘 융합하기 시작했다. 낱개의 물음표들은 융합을 하며 거대한 물음표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 마음 속에는 초거대 물음표가 생겼다. '결국 내가 문제인 걸까?' 초대대 물음표의 질량을 이겨내지 못한 그녀의 마음은 왜곡되고 휘어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결국 찢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미어캣의 모습으로 이 곳에 떨어지게 된 사정.


단숨에 이야기를 마친 두더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시어머니가 그 사람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어. 나이 탓에 예전보다 활력이 떨어진 것, 입시에 실패한 자녀를 보며 느낀 스트레스, 집안일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던 남편 등등... 여러 상황이 그 사람에게 조금씩 부담을 주었던 거야. 시어머니는 그런 여러 상황 중의 하나였을 뿐이고. 뭐, 유난히 고통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 사람이 '시어머니'를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만들어 간 측면도 있어. 그러다가 어느 날 만악의 근원이던 시어머니가 사라졌는데 자기 상황은 변한 게 없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만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어느 쪽이든 괴로운 건 마찬가지고, 어느 쪽이든 결국 괴로운 건 본인이야." 두더지의 해설은 알기 쉽고 명료했지만 어쩐지 미어캣 아주머니에게 영원한 불행을 선고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목이 타들어갔다. 얼마 남지 않은 주스를 입에 털어 넣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지금 어떻게 지내시나요?" "그럭 저럭 잘 지낼 거야. 뭐, 그야 사는 게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 매일 신나게 살지는 않겠지. 그래도 여기에서 배운 걸 잘 기억하고 있다면 마음 속에 초거대 물음표가 생기는 것 정도는 예방할 수 있을 거야. 그거면 되지.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 매일 신나게 살면 그것도 정상은 아냐." 여기에서 배운 거라니. 단순히 보살펴 주기만 하는 게 아닌가? 보살펴 주겠다는 말을 듣고 막연하게 '요양원' 같은 걸 생각했는데, '요양원'보다는 '재활원'에 가까운 건가?


"그럼 이제 저도 여기서 뭔가를 배우게 되는 건가요?" "응, 맞아. 지금까지는 오리엔테이션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수업을 할 거야. 수업 전에 일러두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이 곳에서는 무리할 필요 없어. 수업을 하다가 힘이 들면 힘이 들다고 말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아주 좋은 연습이니까. 하지만 무리할 필요 없다는 말 뒤에 지나치게 숨는 것도 좋지 않아. 노력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제대로 노력해야 해." 모든 행성의 모든 중력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나는 모든 별의 중력을 몸에 새기려고 노력하면서도 정작 내 별의 중력은 잊고 살았지. 내가 기울인 그런 노력은 전부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그러니까 어리석고 바보 같은 노력이었던 걸까?


"근데 제대로 노력해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그건 한 마디 말로 대답해 줄 수 없어. 게다가 사람마다 제각각이거든.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이 곳에서 네가 얻어가야 할 것 중의 하나야." 그 대답이 제법 근엄해서 나는 두더지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왕 고개를 숙인 거 제대로 예를 갖추고 싶어서 인사를 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선생님." 선생님 소리를 들은 두더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안경을 올려 쓰고는 이렇게 말했다. "우물 바닥에 온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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