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또한 선택이고 용기야
"자, 그럼 이제 첫 수업을 시작해 볼까?" 두더지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크게 켜고는 크리넥스 한 통과 펜 두 자루, A4 용지 여러 장을 건네 주었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 그것들을 받아 테이블에 적당히 배치했다. 크리넥스는 사이드로 밀어 두었고 A4 용지는 테이블 한 가운데 두었으며 펜은 선생님과 내 자리에 한 자루씩 놓았다. 두더지 선생님은 백색의 조명을 은은한 주황색의 조명으로 바꾸고, 들릴 듯 말 듯한 볼륨으로 노래까지 틀어놓은 뒤, 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내 앞에 놓인 컵에 주스를 가득 따라 준 선생님은 아주 중요한 걸 깜빡 했다는 듯 황급히 일어나서는 내 자리 주변에 푹신한 쿠션을 잔뜩 놓아 주었다. "첫 시간이라 수업이 좀 길어질 수도 있거든? 앉아 있다가 불편하면 여기 누워도 돼. 이게 의외로 푹신해서 그냥 끌어 안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더라구."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산처럼 쌓여 있는 쿠션 중에서 연보라색의 쿠션 하나를 끌어 안았다.
"어렴풋이 짐작했겠지만 우울증은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상태와 흡사해. 마음에 구멍이 생기는 매커니즘이나 구멍이 생긴 후에 겪게 되는 증세는 거의 유형화 되어 있지. 즉, 서로 다른 이유로 우울증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실제로 보이는 증세는 거의 비슷하다는 뜻이야. 그러다 보니 가끔은 기묘한 일도 일어나. 온라인에서 알게 된 두 사람이 말이 너무 잘 통해서 자연스레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 다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거야. 여기까지는 그닥 놀랍지 않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끼리 말이 잘 통해서 친해지는 경우는 많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작스레 닥쳐오는 불안 같은 '증세'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무척이나 말이 잘 통했는데, '계기'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삐걱대며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어. 알고 봤더니 두 명의 상황이 정반대였던 거야. 한 명은 일처리가 늦고 잔실수가 많은 동료의 뒷수습을 떠맡느라 우울증이 온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언제나 자기 뒷수습을 해 주는 똑 부러지는 동료에게 열등감을 심하게 느껴서 우울증이 온 거였거든."
두 사람의 배경이 그렇게까지 달랐다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에 되려 상처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상대를 위로하면 할 수록 스스로를 부정하는 느낌이었을 테지. 매끈한 마음이었다면 자신이 상처받는 일 없이 상대를 위로할 수도 있었겠지만, 온전하지 않은 마음 상태의 두 사람으로서는 무리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됐나요?" "자연스레 멀어졌어. 뭐, 가까워지는 관계가 있으면 멀어지는 관계도 있는 법 아니겠어? 그리고 난 멀어지는 것 또한 선택이고, 용기라고 생각해. 게다가 그 두 사람, 우울증까지 내몰리게 된 것도 '멀어지는' 선택을 못 해서 그렇게 된 거거든. 동료의 실수를 무조건 다 수습해 주는 대신 이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자기만의 장점을 발굴하려는 노력 대신 뛰어난 동료를 무조건 옳은 것이라 믿으며 거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 거니까 말이야."
멀어지는 것 또한 선택이고 용기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 속으로 몇 번 되뇌인 뒤, 선생님과 나 사이에 놓여 있던 A4 용지 한 장을 가져와 메모를 했다. 사각사각하고 펜촉이 종이를 긁어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두더지 선생님은 내가 메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멀어지는 것 또한 선택이고 용기야." "멀어지는 것 또한 선택이고 용기에요." 맞아요. 정말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