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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Jan 11. 2019

그녀 인생의 이야기

그저 귀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타임캡슐을 만드는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R상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R상의 이야기를 여기에도 기록해 둔다. 




R상은 남편과 이혼 후 혼자 생활하고 있는 50대 여성이다. 딸아이가 한 명 있긴 하지만 이제는 딸도 독립을 했기 때문에 혼자 살고 있다. 왜소한 체구의 그녀는 의외로 가구 만드는 게 취미다. 자기 몸보다 큰 서랍장이나 책상 같은 것도 뚝딱 만든다고 한다. 한 번은 목재를 다듬으러 매번 목공소를 가야 하는 게 귀찮아서 전기톱을 산 적이 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톱밥이 너무 많이 날려서 결국 제대로는 한 번도 못 썼다고 한다. 

R상은 여러 종류의 콜센터에 파견 다니며 일을 한다. 딱히 콜센터에서 일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어쩌다 하게 된 경험이 경력이 되었고, 그렇게 생긴 경력은 계속 비슷한 일을 물어 왔다. R상은 현재 콜센터의 여러 부서 중에서도 단순 문의가 아니라 강성 항의 고객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우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콜센터 근무자들의 감정 노동을 떠올리며 탄식했지만 R상의 반응은 의외였다. R상이 클레임 처리 부서에서 일하게 된 건 자신이 자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단순 문의를 처리하는 부서보다는 클레임을 처리하는 부서가 좋다고. 단순 문의 부서에서는 콜수로 실적을 매기기 때문에 전화 한 통을 되도록 빨리 처리해야 하지만 클레임 처리 부서에는 그런 종류의 압박은 전혀 없단다. 클레임 처리 부서에서 상대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식으로 쉽게 물러날 사람들도 아니니까. 한 통의 전화를 해결하기까지 2시간, 3시간은 기본이고 길게는 몇 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R상은 그 편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R상이 클레임 처리 부서에 일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비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 특별한 마음가짐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에 대해 R상은 이렇게 말했다.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제각각 다르게 반응해요. 소리를 지르며 화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그저 입을 다물어 버리는 사람도 있죠. 사람들이 보여주는 제각각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들 나름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저 사람의 현재 모습 뿐이지만,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 저 사람 역시 지나간 시간을 딛고 서 있는 거겠죠.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내가 조금씩 변해왔듯 저 사람 역시 그렇게 조금씩 변해온 거겠죠." R상은 앵무새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하거나,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의 욕설을 퍼붓는 사람과 통화하는 게 버거울 때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그 사람 마음 속에는 어떤 구멍이 있을까 상상한다고 했다. 


R상의 이야기 중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건 R상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뭐든 우수했던 언니와 달리 R상은 그냥 평범했는데, 엄마는 그런 R상에게만 유독 가혹했다. R상의 엄마는 말보다는 손발이 먼저 나가는 타입이라서 어린 시절 부터 많이 맞았고, 너 같은 건 그냥 죽어버리라는 식의 폭언도 많이 들었다. R상의 엄마는 딸을 위로하기보다는 딸에게 위로 받고 싶어 하는 엄마였다. 자신에게 많은 상처를 준 엄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미워할 수 없었다. '차라리 미워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런 생각을 마음 속에 품은 채 살았다. 그치만 딸을 낳고 부모의 입장으로 10년, 20년 살다 보니 엄마도 그냥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조금씩 실감할 수 있었다. 엄마 역시 엄마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을 지도 몰라,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여러 행동 중에 못된 행동을 일부러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런 못된 행동이 튀어나온 것일 지도 몰라, ...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하나 둘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8년 넘게 R상을 괴롭혔던 우울증의 불길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의이었다. '엄마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마음이 '엄마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뀐 걸 느낀 R상은 엄마와 조금씩 부딪쳐 보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자, 그 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내 감정을 이제라도 전하자, 혹시 엄마 마음에 구멍을 내가 조금이나마 메워줄 수 있다면 힘껏 메워줘야지, ... 하지만 R상의 엄마는 그로부터 석 달 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뿐인데 몇 개의 인생을 직접 살아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R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R상의 인생은 물론 R상 어머니의 인생과 R상 언니의 인생, 그리고 R상 딸의 인생까지도 상상해봤다. 일본에 와서 일본인과 보낸 시간 중에 가장 촉촉했고 가장 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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