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글레 Jan 10. 2019

느슨한 토요일의 기적

자기 것이 아닌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고 


지난 주 토요일에는 한 모임에 다녀왔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약속을 잡고 만나는 이상한 모임이었는데, 모임의 목적은 올해의 타임캡슐을 만드는 것이었다. 주최자가 적어 둔 모임의 개요는 이러했다. [ 각자 올해의 목표가 무엇인지 공유하고, 그걸 올해의 타임캡슐에 집어 넣어요. 초심이 흐릿해졌을 때마다 꺼내 보는 거예요. ] 이렇게 해서 도쿄 타워 근처에 있는 느슨하고 게으른 카페에 생면부지의 사람 네 명이 모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건 나에게 중대한 사건이었으니까. 게다가 올해의 목표를 설명하려면, 그러니까 왜 그런 목표를 설정했는지를 이야기하려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우울증 이야기를 꺼내서 분위기가 무거워지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버전의 목표를 가져갔다. 


첫 번째 버전은 진짜 목표 : "작년에는 우울증 때문에 마음이 연약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누구도 만나지 않았죠. 아니 만나지 못했다고 해야겠네요. 하지만 리워크 센터를 다니며 사람들이 주는 위로를 경험했어요.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것과의 부딪침이기 때문에 연약한 마음에는 쉽게 멍이 들어요. 하지만 그 충돌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마음에는 온기와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것 같아요. 2018년에는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지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는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쳐 보고 싶어요. 온기를 느끼고 싶어요." 


두 번째 버전은 무난한 목표 : "올해는 심리학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싶어요. 또 운동도 꾸준히 하고 싶어요. 2018년은 여러 모로 건강하지 못한 한 해였거든요. 올해는 몸과 마음을 조금 더 건강하게 보살피고 싶어요."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으니 이제 상황이 닥치면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말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마찰을 견디는 연습을 하겠답시고 무리해서 첫 번째 버전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 번째 버전을 이야기하고 나서 괜히 자책할 필요도 없다고, 그런 다짐을 하며 카페에 들어섰다. 헌데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그냥 왠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첫 번째 버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내 이야기 속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이어 달리기의 바톤이 되어 옆사람에게 전달됐다. 그들은 '사실..' 이라는 말로 입을 떼며 자신의 우울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온갖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기 것이 아닌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고, 자기 것이 아닌 결심에 응원을 보냈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서 방에 혼자 쳐박혀서는 자기 이야기를 곱씹으며 눈물을 흘리고, 자기 것인 결심에도 응원을 보내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경험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 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마주침은 서로 다른 것의 마찰이기에 그 쓰라림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바로 그 마찰열 덕분에 마음 속 빙하가 녹아 내릴 때도 있다. 나는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얼음 조각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 올해는 조금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지, 조금 더 많은 빙하를 녹여야지. ] 이것들을 그냥 생각으로만 두기엔 어쩐지 아쉬워서 나는 이것에 '결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토모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