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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글레 Jan 12. 2019

무해한 노력

목적지를 제대로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 멍한 눈으로 인생을 피하듯 살아왔다면 딱 그 정도의 흔적일 것이고, 인생의 질문에 답하는 자세로 살아왔다면 그 사람은 여러 개의 유의미한 나이테를 인생의 흔적으로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닌, 통찰과 고민과 이야기가 고여있는 그런 나이테들. 하지만 아무리 멋진 나이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인간인 이상 흔들리게 마련이다. 


제아무리 멋진 나이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귀가 달린 사람인지라 지나가며 던지는 말들에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고민을 털어 놓는 그들에게 나는 무척 단호하게, 마치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 '그런 말들은 그냥 무시하세요. 지나가는 바람 같은 말들이에요. 하찮은 말들에 흔들릴 필요 없어요.' 


무시하라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나는 무슨 자격으로 내가 직접 듣지도 않은 그 말들이 하찮은 것이라 단언하는가, ... 가끔은 그런 질문들이 번쩍 손을 들지만 나는 그들을 못본 체 하며 단호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리고 참 다행스럽게도 내가 보이는 그 단호한 태도는 상대방에게 종종 도움이 된다. 상대방은 고맙다고 말하며 나에게 말한다. 자유로워 보여요, 강한 사람인 것 같아요, ... 하찮은 말들에 흔들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보며 그들은 내가 하찮은 말들을 무시하며 흔들림 없이 살아가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몹시 부끄럽다. 


부끄러움의 이유는 뻔하다. 진짜 나는 내가 뱉는 말들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 건, 그런 단호한 말로 나를 다잡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주 흔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자주 흔들리는 사람이고, 그 흔들림이 괴로웠다.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니 역시 이번에도 부끄러움이 보였다. 관성과 타성에 젖은 말들에 쉽게 흔들린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흔들리지 말아야지'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혼잣말이었다. 나는 그런 혼잣말이 필요할 정도로 자주 흔들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날고 싶다 말하는 것들은 모두 날지 못하는 존재들인 것처럼. 부끄러움이 잉태한 혼잣말은 다른 이를 위로하지만, 위로 받은 상대가 나에게 고맙다며 인사하는 순간 나의 부끄러움은 다시금 시작된다. 물론 가끔은 고맙다는 인사 없이도 갑작스레 부끄러움의 스위치가 눌리기도 한다. 너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뻔뻔하기도 하지, 라고. 


내 시선이 닿는 곳이 곧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움의 원인이었다. 그 곳에 서 있는 내가 '진짜 나'여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 모습이 되기 위해서 계속 노력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서 하는 노력은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그건 지금 이대로는 안돼, 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노력이니까. 현재의 나를 부정하며 걷는 길이니까. 제아무리 열심히 달리고 걷고 기어서 이전보다 그 곳에 가까워졌다 하더라도 그 곳에 도달하지 못한 이상 나는 계속 부끄러울 뿐이다. 


[ 나는 저 쪽 사람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이 쪽 사람이다. ] 이 괴리 속에서 지금까지의 나는 실제의 나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손 잡아 주고 응원해줘야 하는 건 이 쪽에 서 있는 실제의 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지. 저 쪽에 있는 건 상상 속의 나니까 손을 잡을 수도, 응원해 줄 수도 없는걸. 이렇게 생각하면 꽤나 많은 것이 달라진다. 열심히 달리고 걷고 기어서 이전보다 그 곳에 가까워지면 마음껏 뿌듯해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괜한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나는 내가 들인 노력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며 그것을 동력 삼아 다시 노력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영혼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이니까.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내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내비게이션이라 해도 목적지만으로는, 그러니까 출발지를 설정하지 않고는 예상 경로를 알아낼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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