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彼知己 百戰不殆
"일단은 네 안에 있는 적을 찾아보자." 두더지 선생님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이 묶음 중에서 7장을 헤아려 가져 가서는 각 종이 맨 위에 무언가를 써넣었다. 그리고는 그 종이를 내 앞에 늘어놓았다. "자, 여기, 일곱 종류의 적이 있습니다." 각 종이 위쪽에는 두더지가 방금 써넣은 것으로 보이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 [ 확대해석, 과소평가, 흑백사고, 종말론, 당위의 사슬, 자책의 굴레, 감정과 사실의 혼동 ]
"적들의 이름을 보고 머리 속에 떠오른 것들을 자유롭게 적어봐. 이름을 보고 연상되는 적들의 모습을 묘사해도 좋고, 실제로 그 적들과 맞닥뜨렸던 과거의 기억에 대해 적어도 좋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으면 '떠오르는 것 없음'이라고 적어도 돼. 할 수 있겠어?" "네. 좀 힘들 것 같긴 하지만.. 해야 하는 거잖아요. 올바른 노력인 것 같고요." "하다가 괴로우면 멈춰도 돼. 알지? 무리하지 마." "올바른 노력을 하는 것과 무리하지 않는 게 공존할 수 있어요?" 살짝은 따지는 듯한 내 질문에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좋은 주제네. 나중에 다뤄보자."
나는 종이를 마주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곱 장의 종이에 적혀있는 적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이건 내 안에 있는 못된 습관을 짚어내는 작업이다. 내가 습관적으로 해 온 형편없는 생각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즐거울 리도 없고 유쾌할 수도 없는 작업이다. 하지만 올바른 노력을 위해서는, 그러니까 나의 에너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새어 나가는 걸 막으려면, 지금 내 마음 속 물길의 지도를 점검해야 한다. 꿈과 희망, 칭찬과 격려, 용기와 자신감, ... 나는 인생살이에 필요한 무기를 대부분 잃어버렸다. 그것들을 뜨겁게 생산해 내던 내 마음 속 용광로는 가동을 멈춘 지 오래다. 빛을 잃어가는 나를 돕기 위해 주위 사람들이 수혈해 준 것들 역시 순식간에 어디론가 빠져 나가 버린다. 그것들이 어떤 경로로 내 마음 속 검은 구멍에 이르렀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안내판('이 쪽 길은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이라도 세워두지. 그래야 새로운 길을 만들지.
나는 펜을 들었다. 일기처럼 쓸까, 얘기하듯 쓸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얘기하듯 쓰기로 했다. 그 편이 그나마 숨이 덜 막힐 것 같았으니까. 음산한 폐가에 혼자 들어가는 것보다는 친구와 함께 들어가는 게 덜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용기를 내서 폐가의 문을 열었다. 겹겹의 거미줄과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헤치며 그렇게 천천히 발을 옮겼다. 어두운 복도 저 편, 첫 번째 방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들어가도 괜찮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등 뒤에 서 있던 친구가 부드러운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힘들면 곧바로 뛰쳐 나오자. 전속력으로 도망가자. 나 달리기 되게 잘해." 고개를 돌려보니 앳된 얼굴의 두더지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너보다 더 잘할걸?" 친구 사이에 흔히 주고 받는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나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문에는 [ A. 확대해석 ] 이라고 쓰인 명패가 달려 있었다.
A. 확대해석
내 친구 중에 요리를 굉장히 잘하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가 한 번은 데리야끼 치킨 요리를 만들어 줬는데 너무 맛있는 거야. 물어봤더니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거야. 간장이랑 설탕만 있으면 된대. 그래서 나도 집에 와서 해봤지. 친구가 알려준 대로 넣어서 했는데 색이 너무 묽은 거야. 그래서 간장을 조금 더 넣었어. 그런데도 색이 진해지지 않더라고. 몇 번을 그러는 사이에 요리는 당연히 못 먹을 정도가 되어 버렸지. 너무 짜서 한 입도 못 먹고 다 버렸어. 그 때 생각했지. 아, 나는 요리를 못하는구나.
이건 사실 확대해석이라기보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하지만... 한 번 실수를 저질렀을 뿐인데 마치 내가 꼭 실수 그 자체인 것처럼 과하게 생각하는 거잖아. 그래서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확대해석이 아닐까? 아무튼 그러고 얼마 지난 다음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그 때 그 친구가 묻는 거야. 데리야끼 치킨 요리 잘 해 먹었냐고.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지. 갈색을 내려다가 간장을 너무 많이 넣어서 실패했다고. 그래서 한 입도 못 먹고 다 버렸다고. 그런데 친구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깔깔깔 웃는 거야.
영문도 모른 채 친구와 같이 하하하 웃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봐. (앗, 이것도 확대해석이다. 그치? '그 순간에 웃을 수 없었다'가 금세 '나는 그런 순간엔 웃을 수 없는 사람인가봐'가 되어 버렸어.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네.) 친구가 웃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했어. '요리 잘 하는 사람이 보기엔 이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실수구나.' 계속 피식대는 친구를 보면서는 이런 생각도 했어. '이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 재밌어서 웃는 걸까 아니면 우스워서 웃는 걸까?' 그러다가 결국엔 이런 생각에 도달했어. '얘가 지금 날 비웃고 있구나.'
선생님은 첫 번째 적의 이름을 '확대해석'이라고 알려 줬지만, 나는 그 이름을 '확대해석(-)'라고 고치고 싶어. 좋은 부분만 확대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니까. 하지만 휘어진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적들은 나쁜 부분만 확대해서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해질 무렵 차가 지나다니는 도심의 한 도로를 찍은 사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확대해석(+)씨는 빌딩 사이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태양, 웃고 있는 연인, 꽃집에서 내다 놓은 화분 같은 것들을 보여주지. 반면에 확대해석(-)씨는 말이야. 달리는 차에 깔려 죽은 비둘기나 권태로운 직장 생활에 지쳐서 창 밖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줘. 그런 것까지 사진에 찍혀 있었냐고? 아니. 확대해석(-)씨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이용하거든. 실제로는 그 사진에 찍혀 있지 않아도, 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면 보이지도 않는 걸 보게 되는 거야.
내 표정이 그닥 좋지 않은 것을 눈치 챈 친구는 이렇게 말했어. "아니, 야. 간장을 많이 넣으면 짠 게 당연한데 갈색 좀 내겠다고 간장을 계속 넣었다는 게 너무 웃기잖아. 간장 한 숟갈 넣고 좀 끓이다가 맛 보고 '아, 짜네?' 하고, 그렇게 또 끓이다가 다시 간장 한 숟갈 넣고 또 '아, 짜네?'. 네가 고개를 갸웃대면서 이러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까 너무 웃긴 거야. 크크크." 친구 말을 듣고 그 모습을 상상해보니 진짜 너무 웃긴 거야. 그래서 친구랑 같이 하하하 웃었어.
별다른 의도가 없는 친구의 웃음 속에서 '비웃음'을 굳이 찾아낸 것. 나는 그게 '확대해석(-)'씨의 짓이라고 생각해. 그런 걸 보면 내 마음 속에는 확실히 '확대해석(-)'씨가 살고 있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