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진 Dec 05. 2018

워킹맘 엄마를 미워했다

#2 키우지 못했다고 사랑하지 않은 건 아냐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은행에서 일을 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출퇴근 시간에 주로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엄마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그 당시 내 엄마는 함께 살고 있던 고모였다. 시집도 가지 않은 20대 중반에 육아를 맡게 된 고모는 사람들이 '애엄마'로 볼까 봐 늘 창피했다는 얘기를 지금도 한다. 고모가 결혼한 뒤에 내 엄마는 할머니로 바뀌었다.


할머니는 아주 바빴지만 나를 늘 데리고 다녔다. 버스를 타기 전 늘 만두튀김을 사줘서 좋았던 기억이 있다. 행선지는 독립문의 한 맨션이었다. 거기서 할머니는 다른 아줌마들과 화투를 쳤다.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거나 옆방에 있는 언니에게 갔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언니는 미취학생인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종종 할머니의 판이 길어지면 그 군용 모포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커서 생각해 보니 그게 말로만 듣던 '하우스'였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독립문에 가는 걸 엄청나게 싫어했다. 어떤 엄마가 좋아할까. 하지만 그 때문에 은행을 그만둘 수는 없었으므로 우리의 하우스 출입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의 걱정과 달리, 내겐 그 기억이 나름대로 흥미롭게 포장됐다. 노래 잘 부른다고 '마이크' 할머니, 술 취해서 다리 밑에서 토 했다고 '다리' 할머니 등등 재밌는 캐릭터들이 각인돼 추억으로 남은 걸 보면.


유치원에서 발표회를 해도,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해도 늘 할머니가 왔다. 나는 할머니를 정말 좋아했지만, 엄마 대신 오는 건 싫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1980년대에는 워킹맘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가 오지 않는 아이는 거의 나 혼자였다.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에는 꼭 머리카락 한두 개가 섞여 있었다. 사춘기 들어서는 이게 다 엄마의 부재로 인해 내가 겪는 아픔이라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엄마는 '돈을 벌어서 나를 공부시키는 사람, 그래서 공부를 안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 방문 학습지 여러 개가 나를 괴롭혔다면, 중학생 때는 웬 정신 나간 과외교사가 엄마와 나의 가뜩이나 먼 사이를 더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 과외를 받으면 성적이 쑥쑥 오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엄마는 잔뜩 기대 중이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지 못하면 빗자루로 손바닥을 때리고, 가끔은 안경을 벗긴 후 책 모서리로 얼굴을 치는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성적이 오를 수밖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뜻도 모르고 그저 글자만 달달 외웠다. 밤새 외우다가 까무러치게 잠든 날은 과외선생님이 오기 전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다른 지도 덕분에 딱 한번 국사 과목에서 100점을 맞았다. 그뿐이었다. 이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엄마에게 눈물로 호소해 몇 개월 만에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외를 그만둔다니 화가 나서 그랬는지, 그 교사는 마지막 날 빗자루로 내 엉덩이를 30대 넘게 때렸다. 숙제를 안 해놓고 거짓말했다나? 내 볼기를 넝마로 만들어야 할 이유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엉덩이는 붉다가 파래졌다가 보라색이 됐다가 결국 검게 죽었다. 며칠간 변기에 앉지도 못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을 봤다. 할머니는 "네 엄마가 밖에서 맞는 숫자를 세고 있더라. 독하다"고 혀를 찼다.


그 정도 맞았으면 전교 1등이라도 해야 엉덩이가 억울하지 않을 텐데, 내 성적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그맘때쯤 엄마는 20년 넘게 다닌 은행을 그만뒀다. 아무래도 곧 고등학생이 되는 딸의 공부를 본격적으로 관리 감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으면 뒤에서 "야, 너 뭐 하는 거야"라고 낮게 깔리던 엄마의 음성에 경기를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엄마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출근해서 진상 고객들을 상대하며 벌은 돈으로 나를 가르치든 말든, 알게 뭔가. 결국 난 재수학원까지 다니면서도 노래방, PC방, 만화방을 전전하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엄마의 죄는 내가 필요할 때 옆에 없었던 것, 그러니까 '나를 키우지 않은 죄'였다. 시간이 없으니 돈으로만 나를 키우는 사람, 그 양육조차 대부분은 교육에 집착했던 사람. 그 당시 내 생각에 그랬다. 그래서 내가 기대하는 만큼 성공하지 못해도 엄마는 할 말이 없어야 응당했다. 지금에 와서야 엄마가 왜 악역을 도맡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니, 엄마가 악역이라고 여겼던 내 중2병이 서른이 가까워서야 차도를 보였다는 게 맞겠다. 내가 아이를 낳고 워킹맘이 된다면, '키울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까지 오롯이 헤아릴 수 있을까.


지금 환갑이 넘은 우리 엄마는 키우는 강아지가 꽃을 살짝 밟아도 마음 아파하는 여린 사람이다. 내 발이 차면 손으로 감싸서 녹여주는 따뜻한 사람이다.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