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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Nov 16. 2018

경치 좋은 감옥이로구나

#2  어서 와, 이런 제주는 처음이지?

밤비를 가슴에 묻고 시작된 제주에서의 첫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2016년 1월, 제주시는 93년 만에 최저기온을 기록했고 32년 만에 적설량도 경신했다. 하필 우리가 이사 온 딱 그 겨울에 말이다. 눈 외에 보이는 게 거의 없는 집 밖 사진을 본 지인들은 "제주도가 아니라,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갔냐"고 했다.


무릎 위까지 쌓인 눈을 헤쳐나가려다 포기, 우리 가족은 그 뒤로 3일간 '고립'됐다. 비슷한 상황에 있던 이웃 아저씨가 흡연의 욕구 덕분에 기적적인 힘을 얻어 우리 집까지 헤엄치듯이 와서 담배를 꾸어갔을 뿐 누구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축된 식량이 떨어져 갈 때쯤 한라산 소주와 라면 등을 '시가'로 거래한다는 이웃 간 농담이 오고 갔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제주도는 따뜻하다고 들었는데... 육지에 살면서도 이렇게 많은 눈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사나흘이 지나 가장 먼저 앞집의 4륜 트럭이 시동을 걸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렇게 길이 조금씩 트이면서 엘사가 살 법한 겨울왕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빠가 열 두번째 눈을 치우고 있다. 쓸데없는 일이다. 곧 열 세번째 눈을 치울테니까.


눈에서 해방됐지만 우리는 아직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엄마와 나에게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는 그 동네에서의 생활은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에 정류장이 있었지만, 버스가 지나가는 건 하루 3번. 오전 7시 버스는 너무 일러서 탈 일이 없고, 오후 5시 버스를 타고 나가면 돌아올 수가 없다. 그래서 그나마 적당해 보이는 오후 2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간 나는, 비바람 속에 3시간 동안 버스를 기다리다가 봉두난발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우유 2팩을 사 오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니. 전에 살던 집 근처에는 편의점만 서너 개, 걸어서 10분 거리엔 대형마트가 있었다.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에는 늘 차가 넘쳐흘렀다.


"경치 좋은 감옥이 따로 없구나"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 햇살을 쬐고 있던 우리 가족 중 누군가 말했다. 아마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만, 누가 유배를 보낸 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의 불만은 무의미했다. 특히나 제주행을 강력히 밀어붙였던 아빠와 나는 먼산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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