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기만 오면 다 될 줄 알았지
대학을 늦게 졸업하고 딱 1년을 놀았다. 28살이나 되었는데 학생도, 무엇도 아닌 신분의 무직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을 오그라들게 하는지 그때 처음 느꼈다. 알바라도 하지 않으면 밥을 굶는 사정은 아니었기에 더욱 철이 없었던 나는 엄마가 해주는 따순 밥을 먹으며 1일 1개 입사지원서를 쓰는 것이 전부인 나날을 보냈다. 일반기업, 공기업, 은행 등 뚜렷한 방향성이 없었던 입사지원 행태를 보면, 딱히 꿈이 있었다기보다 빨리 목에 번듯한 사원증을 거는 직장인이 되어 이 창피한 상황을 면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듯하다.
서류전형에서 백전백패를 하고 난 뒤에야 내 눈은 중소기업으로 내려갔다. 그마저도 최종면접에서 떨어지고 망연자실한 나는 취업사이트 공채란 뒤지는 일을 그만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학교 다닐 때 그나마 관심이 있었던 '애니메이션'을 사이트 검색창에 적었다. 애니메이션 전문지 기자를 뽑는 회사 하나가 떴다. 집에서 지하철로 2시간이나 걸리는 곳이었지만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에 지원했고, 나의 첫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난생처음 '독립'도 했다. 출퇴근만 4시간을 지옥철에 매달리다가 두 달 만에 백기를 들었고, '엄마론' 5천만 원을 얻어 회사 근처에 아주 작고 오래된 자취방을 얻었다. 지은 지 30년 된 그곳에서 나는 <파브르 곤충기>를 능가할 정도로 매일 새로운 종의 수많은 벌레를 잡았고, 길이 30cm의 돈벌레가(모두 믿지 않았지만 진짜다) 출몰한 뒤로 다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역시 엄마의 도움으로 똑같이 작지만 신축인 자취방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3년 가까이 기자로 일한 나는 퇴사 후 다른 곳의 기자가 되었다. 백수 시절 꿈에 그리던 '공채'에 합격했다. 애니메이션 전문지 기자로서의 경력은 인정되지 않았기에 나이 서른에 또다시 신입이 되었지만, 목에 걸 수 있는 사원증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첫 직업으로 기자를 선택해서 또 기자가 되었을 뿐, 사실 적성에 맞지는 않았다. 어릴 때 짜장면 주문전화도 못 했던 나는 늘 사람을 상대하는 게 어려웠다. 무엇보다 기사가 아닌 생활글을 쓰고 싶었다. 육하원칙에 어긋나도 재밌는 글이 좋았고, 팩트(사실)보다는 감성에 집중했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이렇게 블로그에 끄적이는 글로 풀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직장 동료들과 쓴 그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난지도 파소도블레>, 작은책, 2015)
그 책이 나올 즈음 나는 퇴사와 제주 입도를 준비 중이었다. 시작이 마련된 끝맺음은 섭섭함보다는 시원함이 큰 법이다. 그래서 불안함이라곤 없었던 걸까.
"제주도 가면 내가 알아서 취업할 테니 걱정하지 마~"
제주도에는 다음이라는 대기업이 있다. 우리 회사에 다니다가 다음에 입사했다는 한 선배의 이야기도 익히 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직서를 쓰면서도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내 경력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곳은 기자뿐이었다. 그마저도 임금은 원래보다 3분의 1이 적었다. 월급을 똑같이 받는다 해도 기자는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이때까지 아직 배가 불렀다는 소리다.
결국 나는 두 달째 소파에 앉아 매일 똑같은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경치 좋은 곳에 사니 얼마나 좋으냐"는 지인들의 연락을 종종 받으면서. 다시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