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격의 총각
제주도에 집을 보러 오던 날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건축주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내게 귤을 건넸다. 귤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키가 크다' '대머리다' 정도의 인상만을 남겼던 그를 크리스마스 때 다시 만나게 됐다. 앞집에서 열린 조촐한 파티에 그가 온 것이다. 그는 우리 동네도 아닌 성산에 살고 있었는데, 건축주를 비롯한 이웃들과 친한 모양이었다. 귤농사는 부업이고, 원래 직업은 돌챙이(제주 돌담을 쌓는 석공)라고 했다. 사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나, 아니면 나중에 들었나 모를 정도로 그에게 무관심했다.
며칠 뒤 그에게 "일출을 보러 같이 가자"는 문자가 왔다. '작업'이다. 가족들과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내키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던 그와의 대화가 이어진 건 우리가 폭설에 감금됐을 즈음이다. 그는 굴러가는지 의심스러운 구형 코란도를 타고 나를 구하러 왔다. 계속 거절할 수 없으니 밥이나 먹고 오자는 심정으로 눈 덮인 집을 빠져나갔다.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코란도가 빙판길에 빙그르 돌았다. 당황했지만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웃겼다. 조수석에 앉아, 무관심 속에 잊은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귀까지 내려오는 털모자를 쓴 덕분에 많은 부분이 가린 그의 얼굴은 꽤 매력적이었다. 그는 이 털모자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와 또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보다 2살이 많았다. 불혹을 앞두고 있는 그의 이마에 '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있는 듯해서 불안했다.
"혹시나...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저는 결혼 생각이 없어요. 그냥 만날 수는 있는데, 그쪽한테는 시간낭비잖아요. 그래서 더 만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얼근해진 얼굴의 그가 어린애처럼 "그건 너무 섭섭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떼를 썼다. 우리는 식어가는 파전을 앞에 두고 잠시 어색해졌다. 그는 "지금 당장 결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에둘렀다.
"선생님이 나랑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테러를 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그때까지는 일단 만나보자."
역시나 거절에 재능이 없었던 나는 거절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너만 손해일 텐데...'라는 말은 눈빛으로만 전했다. 통장잔고만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서른 중반을 넘어선 백수, 이 와중에 연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