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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Nov 18. 2018

빵집을 차릴 수 있을까 1

#5 십리를 걸어 제빵학원으로

제주도에 내려온 후 석 달을 논 주제에 연애까지 시작하자, 이대로는 이 섬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언제까지 부모님 집에 얹혀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육지에서 원래 하던 기자는 여전히 다시 할 생각이 없고, 그 외엔 글밥 먹는 일을 구직란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방향을 틀었다. 취업 대신 공부를 하기로. 이제 와 고시 준비는 아니고, 제빵학원에 등록했다. 밥보다 빵을 좋아해 삼시세끼 '빵식'을 할 수 있으니 만드는 일도 재밌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제주도 가서 취업 안 되면 시골마을에 작은 빵집이나 차리지 뭐.' 이런 안일한 계획이었다.


그 시점에서 읽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이 불을 활활 지폈다. 직장을 그만두고 느지막이 한 시골마을에서 천연균을 연구해 건강한 빵을 만드는 일본인의 이야기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 빵을 좋아하는 마음, 게다가 시골. 제주도 중산간마을의 우리 집은 자연 그 자체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변에는 사람보다 노루와 까마귀가 많다. 거미와 나방, 지네는 어른 손바닥으로 가려지지 않는 남다른 크기를 자랑한다. 이런 환경이라면 슈퍼 천연균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현관문을 열면 가끔 노루가 서 있다. 이런 천혜의 자연이라면 슈퍼 천연균이 탄생할 것이라 믿었다.


제주시에 있는 학원을 등록하고 나서 가장 큰 걱정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일이었다. 편도 2km, 왕복 십리를 걸어 나가야 시에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육지에서도 하루 4km 정도는 걸어 다녔지만, 인적은 없고 까마귀뿐인 험난한 농로를 걷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마저도 버스를 놓치면 30~40분을 기다려야 해서 머리를 산발하고 광인처럼 뛰어간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가끔 폭우가 내리는 날에는 아빠 차 찬스를 쓸 수도 있었지만, 백수라는 나의 처지에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는 건 두 다리밖에 없었다.


학원은 재밌었다. 대나무 숲과 소파를 벗어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말을 섞으며 만든 빵을 나눠먹으니, 밀림에서 살다가 처음 인류와 조우한 것처럼 이제야 사는 것 같았다. 공부라기보다 놀듯이 학원을 다녔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들이 종종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다. '여기서 공부하면 기능사 자격증을 딸 수 있을까, 자격증을 따면 빵집에 취업할 수 있을까, 남의 가게에서 얼마나 일해야 내 가게를 차릴 수 있을까.' 내가 만들고 싶은 천연발효종 하드계열(바게트나 깜빠뉴처럼 겉이 딱딱한 빵)은 기능사 품목에 없어 배우지 못했기에 맞는 길로 가는 건지 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일단은 자격증을 손에 넣고 다음을 생각해 보자.'



실기시험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긴장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제과기능사에서 '찹쌀도넛만 나오지 마라' 기도했는데 찹쌀도넛이 출제됐다. 맙소사. 워낙 시험 울렁증이 심한 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 계량을 하고, 반죽을 돌리고, 까먹은 건 적당히 곁눈질로 커닝하며 도넛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간당간당하게 합격! 시험 하나를 치르고 나니, 제빵기능사는 부담이 덜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쉬운 품목인 소시지빵이 출제됐고, 조금 더 괜찮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자격증을 손에 쥔 나는 하이패스라도 장착한 것처럼 당당하게 취업할 빵집을 알아봤다. 그중 규모는 작지만 손님이 많은 빵집에 면접을 보러 갔다.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어요? 7시에 나와요."


면접인 듯 면접 아닌 면접 같은 게 이 한마디로 끝났다. 내 자격증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빵집에서 일하는 20~30년 경력의 제빵사들 중 누구도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신입 제빵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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