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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Nov 20. 2018

우리가 어쩌다 이 섬에서 결혼을

#7 태풍 탈림을 극복하고 부부로

"저는 그냥... 대머리만 아니면 돼요."


누군가 나에게 소개팅을 주선한다며 이상형을 물어보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얼굴은 크게 따지지 않지만 마지노선은 머리숱이라는 말이다.(천만 탈모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디까지나 취향이었으므로 양해 부탁드린다) 나는 페이스북에 나와 예비신랑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청첩장을 올리면서 다소 민망했다. 내 마지노선을 우습게 넘어선 그의 민머리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겸연쩍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내 인생에 결혼은 없을 거라 단정했다. 나 하나 살기도 버거운데 누군가와 생활을 함께 하다니, 굳이 왜? 출산은 더더욱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존재를 태어나게 한다는 건 너무 아찔한 일이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와 오랜 지인들을 뒤로하고 제주로 가더니 1년 반 만에 청첩장을 보내왔다. 나와 함께 독신을 약속했던 지인들은 배신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남자 친구와 1년 반을 만나면서 350번은 싸웠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오늘은 헤어져야지' 마음먹기도 했고, 실제로 30분가량 이별했던 적도 있다. 그는 습자지에 물이 스며들듯 '우리는 결혼할 것'이라고 주입시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식장을 예약하고 있었다. '사귀자' '오늘부터 1일' 같은 낯간지러운 말도 없이 연인이 됐을 때처럼,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을 약속했다. 장가가고 싶은 남자 친구는 기다리고, 일은 매너리즘에 빠진 진퇴양난 가운데 갈팡질팡하다 어딘가로 뛰어든 게 하필 유부녀로 가는 길이었다.


워낙 독신주의가 완고했던지라 사람들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를테면, 거대 한라봉 농장주 혹은 그 아들이라도 되는 거냐고. 신랑 될 사람은 부업으로 귤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자기 밭이 아니었고, 수확철에는 혼자 작업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다.


"결혼하면 너는 밭 옆에서 파라솔 펴고 책을 읽어. 밭일은 내가 할게."


녹음을 해둘 걸 그랬다. 결혼 후 남편은 나에게 귤 가위를 쥐어줬다. 얼마나 열심히 땄는지, 집에 와서도 손이 가위질하는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서 귤이 내려오고, 자면서도 가위질을 했다. 내가 "파라솔 아래서 독서는 언제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면, 이제 남편은 "농약 줄 잡아달라고는 안 하잖아"라고 오히려 생색을 낸다.


결혼식이 예정된 날 태풍 탈림이 제주로 북상 중이었다. 우리는 야외에 식장을 마련했고, 하객들은 육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 예정이었다. OMG...


결혼식은 참으로 긴박했다. 2017년 9월 16일, 하필 태풍 탈림이 제주로 북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야외 결혼식이었다는 것. 육지에서 자주 가던 웨딩홀 결혼식처럼 15분 만에 후다닥 일을 치르고 싶지 않아서 내가 야외를 고집했다. 마침 제주도에는 생각보다 저렴하게 잔디밭을 빌려주는 장소가 있었다. 우천 시 예식을 올릴 수 있는 공간도 있긴 했지만, 1970년대 부모님 결혼사진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태풍이 비껴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시시각각 태풍의 경로를 확인하느라, 당사자인 우리는 물론 가족들까지 잠을 설쳤다. 육지에서 제주로 내려오는 하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비행기표를 취소했다는 손님들도 있었다. 그 모두의 걱정이 어깨에 벽돌처럼 얹혔다. 차라리 육지에서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수차례 해봤지만 이제 와 어쩔 건가. 지인들은 영화 <어바웃 타임>의 한 장면(두 주인공이 비바람 속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같을 거라고 위로(?)했다. "결혼식날 비 오면 잘 산다던데, 무려 태풍이니 너무 잘 살겠다"는 덕담도 여러 번 들었다.


야외에 의자를 깔 것인가, 실내로 들어갈 것인가. 오전까지 결정해야 했다. 의자를 깔았다가 비가 오면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 여기에 100만 원이 왔다 갔다 했다. 아침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을 접었다. 그때 예비신랑에게 전화가 왔다.


"그냥 의자 깔자! 돈 버리더라도 해보자"


결의에 가득 찬 그는 마치 체조경기장 콘서트를 앞둔 그룹의 리더 같았다.(남편은 당시 자신의 결정력과 카리스마에 대해 아직도 얘기한다) 결국 우리는 의자를 깔았다. 거센 바람에 식장을 꾸민 장식들이 날아가고, 면사포가 내 얼굴을 계속 때리는 우스운 장면이 연출됐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하늘이 잔뜩 흐렸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태풍을 극복했다!


신랑은 미리 준비된 공연팀과 함께 싸이의 '연예인'을 부르며 춤을 췄다. 얼마나 격렬했는지, 멱살잡이 당한 사람처럼 예복이 흐트러질 정도였다. 내게는 비밀로 했던 그 무대에 적잖이 놀라면서, 신랑이 왜 그토록 야외 결혼식을 강행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제주도로 북상한 태풍 탈림을 극복하고 부부가 되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태풍 같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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