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언제든 다시 취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주도 이주를 결심하고, 나름 어렵게 입사한 신문사를 퇴사하면서 다시 기자로 일할 날이 오게 될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기자로서의 역량이 크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경력을 이어갈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다시 기자를 하게 된다면 그건 제일 마지막일 것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작은 빵집이나 운영하면서 남는 시간엔 글을 쓸 거야."
제빵 자격증을 따고 빵집에 취업했을 때까지만 해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닌 줄 알았다. 결혼과 함께 잠시 빵집을 그만두었지만, 다시 제빵사가 될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빵을 만드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더군다나 임신을 준비하며 하루 종일 서서 힘을 써야 할 일이 많은 직업을 택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마지막 카드를 꺼내야 할 순간이 왔다. '기자나 해야겠다', 그런 거만한 심보였던 것 같다.
생각보다 제주도에는 그 면적에 비해 적지 않은 신문사가 있었고, 구인공고도 꽤 자주 났다. 나는 결국 한 신문사에 원서를 써냈다. 공고가 난 곳의 기사를 읽어보고, 그나마 다양한 기획과 탐사보도를 하는 회사로 고르고 골랐다. 이왕 하는 것, 보도자료를 베끼거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목을 매고 싶지는 않아서다. 그리고 신문사가 나를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며 또다시 착각의 늪에 빠졌다. 내가 전 회사에 공헌한 건 없지만, 그래도 좋은 기사를 써온 선후배들이 있기에 내 경력에 힘이 실릴 것이라 믿었다.
면접을 본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제야 내 처지가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8년 경력이지만 취재는 문화연예 쪽에 국한되어 있고, 마흔이 가까워 온 유부녀에, 아직 아이는 없음.' 게다가 내가 지원한 신문사는 제주도 지도에서 보자면 서귀포인 우리 집과 끝에서 끝이었다. 면접관도 집이 멀다는 걸 계속 걱정했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마 좀 더 개인적인 내 처지 안에 있을 것이다. "아직 자녀가 없군요"라는 면접관의 말은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하지만 회사로는 달갑지 않을) 일을 함축하고 있었다. 임신, 출산, 육아.
"우리는 종합 일간지인데... 애니메이션 잡지 경력으로 하실 수 있겠어요?"
내가 잡지 경력 바로 위에 쓴 신문사 경력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나 보다. 애먼 남편의 직업은 왜 물어보는지. 나의 직무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에 적당히 답하다가 '석공인 남편과 단둘이 제주시도 아닌 서귀포 시골마을에 사는 주부'로서의 면접이 대충 끝났다. 그 방을 나설 때 "쓴 커피 한잔 드려"라고 했던 면접관의 말이 탈락을 뜻하는 일종의 암호였나 보다. 그 쓴 커피는 너무 뜨거웠고, 식기를 기다릴 만큼 그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서 바로 집으로 왔다.
생각해 보니, 면접 당시 내 앞에는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취업준비생들이 있었다. 예상 질문지를 들고 바들바들 떨 정도의 간절함과 야근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가득 찬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간절함이 없었고, 회사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일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몸집만 불어난 경력자. 나는 반기기 어려운 지원자였다. 그리고 스스로 눈치채기 전부터 이미 '경단녀'였는지도 모르겠다. 아껴왔던(?) 마지막 카드는 이미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다시 기약 없는 임신을 기다리며 집안을 굴러다니기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올해 여름, 집을 얻는 데 통장 바닥을 긁다시피 썼기 때문에 다시 채워야 하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최대한 앉아서 일하며, 야근이 없어야 했다. 사무직은 거의 제주시에 몰려 있었기에 그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 대부분이 걸러졌다. 그러다가 한 군데가 남았다.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알바를 구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했다. 알바라니, 15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