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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Feb 26. 2019

15년 만에 다시 알바생

#11 경력 단절 후...이 일을 또 하게 될 줄이야

대학생 때 참 다양한 알바를 했었다. 방학 때 잠깐 일하는 거니까 모두 단기였다. 전단지 돌리기부터 돈가스 가게와 카페 서빙, 모자 공장에서 실밥 뜯고 포장하기 등등. 행사장에서 VIP들의 외투를 받아주는 알바도 아주 짧게 했지만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 인바운드 콜센터는 반나절 만에 돈도 받지 않고 도망쳐 나온 유일한 알바였다. 홈쇼핑에서 속옷을 산 이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홍삼진액 구매를 권하는 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절대 환영받지 못할 '스팸' 전화였지만, "세 봉지까지 뜯어 드셔도 환불이 된다"는 말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꺼이 사겠노라고 했다. 나는 쓰여있는 대로 읽었지만, '진짜일까' 싶기도 했다. 왠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한 찜찜함과 몇 번의 욕 세례 때문에 더 이상 수화기를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점심 먹으러 나온 김에 그냥 집으로 왔다. 나와 달리, 로봇처럼 그 모든 감정을 컨트롤하며 한 달을 버틴 내 친구는 월급을 받아 토끼털 코트를 장만했다.


그로부터 15년쯤 흐른 지금, 다시 '알바헤븐'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이전글 참고: 나는 이미 '경단녀'였다) 기약 없는 임신을 기다리다 지쳐 단기로라도 일을 하기로 결심했고, 적당한 알바를 발견했다. 하루 종일 앉아있을 수 있는 데다가, '칼퇴'가 가능하고, 심지어 바쁘지 않은 오후는 내 시간으로 쓸 수 있는 과일가게다.


11월부터 제주도, 특히 서귀포에서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게 귤이다. 노지귤 철이라 농가와 상인들 모두 바빠진다.


제주도에 흔하고 흔한 것이 귤이다. 내가 일하는 가게에서는 귤과 함께 다양한 만감류를 판다. 나는 여기서 전화주문을 맡고 있다. 주로 문자메시지로 오는 주문을 엑셀 파일로 기록하고, 운송장을 출력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수준의 노동이었다. 기자 시절의 타이핑 실력을 여기서 다시 쓰게 될 줄이야.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주문 외에 불만 접수도 내게 온다는 것. 알다시피,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15년 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인바운드 콜센터 알바 때보다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만나고 있다.


불만사항은 대개 과일이 터진 것이다. 싱싱한 귤은 탱탱한 상태에서 상자에 충격이 가해지면 금이 간다. 우리는 멀쩡한 귤을 보냈지만, "어떻게 이런 걸 파냐!"는 항의에는 일단 죄송하다고 해야 한다. 택배사에서 배송이 늦어지거나 물건을 분실해도 우리에게 항의가 온다. "저희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은 화가 난 손님들에게 큰 의미가 없다. 한번은 발송이 늦은 주문에 대해 항의가 들어왔는데, 평소와 똑같이 응대했지만 "말하는 게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분명히 죄송하다고 했지만, 더 죄송했어야 했나 보다.  


모르긴 몰라도 저 사람 울고 있을 것 같다. 콜센터 일을 오래 하진 않았지만, 전화로 사람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겠다.


불특정 다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수도 없이 해본 적이 있었던가. 언젠가는 퇴근 후에 주문전화를 받지 못한 것까지 죄송하다고 했다.("퇴근했는데 어떻게 받아야하죠?"라고 반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변명은 화가 난 손님들에게 안 하니만 못하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기에 15년 전처럼 도망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택배사에서 배송이 하루 늦어진다고 애먼 내 고름을 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다려보죠 뭐~ 수고하세요!"라고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후자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잘 받았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 화답하는 손님들에게도, 내 장사는 아니지만 고맙다.


제주도에 큰 비가 와서 귤 수확이 늦어진 적이 있다. 미리 주문했던 손님들에게 "하루 늦게 발송한다"는 사과 문자를 돌렸는데, 한 분이 "날씨 추워질 텐데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보내왔다. 이렇게 황송할 때가. 내가 직접 귤을 따는 것도 아닌데 그 문자가 너무 따뜻해서 캡처해 갖고 있다.


이런 손님들 덕분에 일할 맛이 난다.


기자로 일할 때는 좋은 기사를 썼을 때 보람을 느꼈다. 이 가게의 ARS이자 엑셀파일 같은 나는 어떤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사람의 온기 그거면 된다. 사람에게 치이고 사람에게 치유받는 건 고객을 상대하는 거의 모든 직업이 비슷한가 보다. 무엇보다 다시 노동을 하고 돈을 번다는 게 제일 보람 있다. 출근할 때 정면으로 보이는 한라산이 멋있고, 퇴근할 때 보는 서귀포 앞바다는 더 멋있다. 요즘엔 밥맛도 더 돌고, 잠도 달다.


"불면증 있다는 사람들 하루만 일 빡세게 해 보라고 해. 베개에 머리만 붙여도 곯아떨어지지. 막일하는 사람들 중에 불면증 있다는 소리 못 들어봤다."


베개에 머리만 닿아도 잠이 드는 '노가다' 남편이 만날 하는 소리다. 얼마 전까지 불면증이 있었던 나는, 남편의 증언에 의하면 요즘 코까지 골면서 잔단다. 그래서 남편이 자꾸 "집에 산짐승이 사는 것 같다"고 놀리지만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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