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알고 보면 '츤데레'
종종 제주도 이주를 생각하며 '텃새'를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 같은 나라 안에서 그냥 '이사'를 하는 것뿐인데, 멀리 떨어진 섬이 주는 낯섦이 있나 보다. 제주도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괸당(혈족, 친족)' 문화가 진입장벽을 높아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혈연을 챙기는 게 비단 제주도뿐이겠냐만, 문화라고까지 하는 걸 보면 보통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나도 했었다.
사실 제주 토박이와 사귈 기회가 내겐 많지 않았다. 내가 부모님과 이사 온 곳은 중산간 마을의 대나무 숲 한가운데였다. 처음 집으로 오던 날 태워다 준 택시기사님이 마을 이름을 두세 번쯤 말했을 때야 "아~ 거기 예전엔 사람도 안 살던 곳인데?"하고 의아해할 만큼 주민들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대부분은 도시에 살며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꿨던 육지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어떤 모임에서 만난 토박이들이 "왜 거기에 살아요?"라고 물어볼 정도이니, 진짜 제주도 사람이라고 할 만한 이웃을 보지 못했을 수밖에.
내가 말을 섞어본 몇 안 되는 토박이들의 인상은 '무뚝뚝하다' 정도였다. 그것도 장년층과 노년층에 국한됐다. 아무래도 초반에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투리 때문일 것이다. "~게" "~합써!" "~꽈?"처럼 거센 발음으로 끝나니까 일단 화를 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내가 겪어본 바, 중년층까지는 어른들과 이야기할 때가 아니면 거의 표준어로 말하거나 줄임말 수준의 간단한 사투리를 쓴다) 이쪽에서 잘 못 알아들으니, 답답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화가 부드럽게 되기 어렵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내려와 살고 있는 육지 친구를 만나 제주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토박이가 대부분인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나보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특징이 있어요. 자기주장이 강하고, 약간 폐쇄적이랄까."
성격은 '지역'보다 '사람' 나름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말에 일부 동의한 건, 이들이 외지인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정도는 나도 느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탐라국 시절부터 육지에 조공을 바치는 등 수탈을 당했고, 가깝게는 1940년대 말 외지인들에 의해 수많은 도민들이 희생당한 4.3 사건을 겪었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이 지역색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분석되곤 한다. 게다가 바람 많이 불고 땅을 파면 돌이 가득한 외딴섬. 온화해 보이지만 실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 흔적들이 그들을 억세 보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달리, 남편은 제주에 와 토박이들이 많은 동네에 살았다. 외지에서 혈혈단신으로 마을에 들어온 키 큰 총각을 처음부터 살갑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 눈에 훤하다. 그는 여느 지역 농촌이 그렇듯 부족한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고 한다. 품삯은 돈으로 받을 때도, 당근 혹은 무로 받을 때도 있었다. 마을 행사가 있을 때는 웬만하면 참석해 얼굴을 자주 비추니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늘어났단다. 이웃 할망들은 "빨리 장가가라"며 애정의 등짝 스매싱을 날리곤 했다고. 또, 아무도 없는 집에 불쑥 들어와(촌집이라 잠금장치가 없다) 놀랐지만 종종 먹을거리를 툭 던져놓고 가기도 했단다.
우리가 결혼할 때도 남편이 살던 동네분들이 많이 참석했다. 내가 나름 친하게 지낸(다고 생각했던) 육지 출신 이웃들은 딱 한집이 왔을 뿐이다. 남편은 결혼 후 멀리 이사를 왔는데도 가끔 이전 마을 행사에 참석하려 노력한다. 얼마 전에는 다른 일로 그 동네에 갔다가 귤 10kg을 얻어왔다.
"지비 미깡 이시냐~ 한 박스 가져가라게~"
웬만하면 제주도에서 귤 사 먹을 일은 없다. 후한 인심 덕에, 노지귤 따는 겨울철이 되면 어떻게든 파치 한 박스는 들어온다. 그래서 외지인이 내려와 귤을 끊이지 않고 먹으면 나름 잘 적응하며 산 거라고들 한다.
나보다 제주에 조금이라도 오래 산 남편의 생각은 '텃새를 걱정하기 전에 먼저 다가가는 게 낫다'는 것이다. 제주도에 살아보겠다고 들어온 외지인들이 적응을 못 하거나 여러 이유로 떠나는 걸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쉽게 정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언젠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웃음이 터진 적이 있다. 한 할아버지가 도착한 버스를 타려고 하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이 버스 그 집 안 가우다~ 딴 거 탑서!"라며 '노룩(No Look) 안내'를 하고 무심히 가버렸다. 표정이나 행동으로 보아 지인도 아닌 그저 같은 동네 사람이나 구면인 모양인데 그 모습이 왠지 낯설면서 재밌었다. 버스 옆자리에 누군가 앉으면 초면에도 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일장 감수과? 벗행 가게 마씸(오일장 가세요? 친구 해서 갑시다)"
인터넷 용어로 '츤데레(쌀쌀맞아 보이나 실제로는 다정한 사람)'라고 하던가.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속정 많은 사람들. 어찌 보면 육지 사람들보다도 경계심이 없다는 게 내가 3년간 개인적으로 느낀 인상이다. 물론 어느 지역이나, 어디까지나, 사람 나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