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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May 03. 2019

제주도에서 걸린 '육지병'

#13 이 섬이 좋아서 왔다가 떠나는 사람들...왜일까

"제주도 살면 좋겠다."


여기 이사 와서 4년 동안 지겹게 들은 말이다. '제주도=여행'이라는 공식 때문인 것 같다. 매일 놀러 온 것처럼 살 수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풍경 좋은 곳에 살아서 나쁠 일도 없다. 다만, 풍경이 너무 좋아서 약간 섭섭한 건 있다.


처음 부모님과 이사 왔던 중산간 마을에서 나는 생전 처음 노루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워프! 워프!" 개가 짖는다기엔 좀 더 거칠고, 목이 쉬어버린 큰 괴물이 비명을 지른다는 표현이 맞겠다. 글자로는 그 소리의 형태(?)를 적을 수 없을 정도로 괴상망측했다. 곤충도감에나 실렸을 법한 손바닥 크기의 거미와 나방 역시 처음 봤다. 털이 달린 그 나방을 동네 사람들은 '새'라고 불렀다. 아빠가 거실을 걷다가 지네를 발로 찬 적도 있다. '발에 차일' 정도로 많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잠을 자면 천정에서 거미가 얼굴로 떨어지는 악몽을 꿨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살고 싶었던 우리 가족의 꿈이 조금 분에 넘치게 이루어졌다.


슈퍼라곤 2.6km 떨어진 곳의 편의점이 전부인 이 오지에서 나는 결혼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다. 신혼집을 얻은 동네는 이전에 비하면 명동 수준으로 번화했지만, 내가 갈 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예전 '뱃사람들의 놀이터'답게 유흥주점과 다방이 즐비했다. 패스트푸드점 '로떼리아'와 잡화점 '다잇소'가 생겼을 때는 쇼핑센터가 들어선 것처럼 뛸 듯이 기뻤다. 이러다가 대형마트 '임아트'까지 들어오는 거 아니냐고 남편과 농담을 했다. 모두 육지에 살 때는 마치 공기처럼 존재의 소중함조차 느낀 적 없던 것들이다.


서울에 놀러 갔을 때 남편이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곳이다. 잠실 롯데타워! 제주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다.


"오빠, 나 서울 가고 싶어! 나이트 가고 싶어!"


2014년 MBC <무한도전> 출연진이 제주도에 살고 있는 가수 이효리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읍소했다. 당시 육지에서 시청자로 볼 때는 웃고 넘겼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알겠다. 그리고 깊이 깨달았다. 나는 서울의 네온사인과 고층빌딩의 그늘 아래서 꽤 행복했다는 것을. 35세까지 서울 경기 생활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내가 산과 바다만 바라보며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부산에서 오래 살다가 제주도로 온 지인 역시 '육지병'을 토로했었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 그는 백화점에 가고 싶다며 울부짖었다(제주도는 백화점이 없다). 할 수 없이 집 앞에 흔한 빵집 '불란서바게트'라도 매일 간다는데, 갈증이 해소될 리 없다. 나 역시 병이 도진 날은 큰 맘먹고 시외버스를 타고 제주시로 나가 마트를 하염없이 걷다 오곤 했지만, 서울에 대한 타는 목마름은 더해갔다.


첫 신혼집에서 좀 더 큰 집에 살기 위해 촌으로 이사를 오자 유흥주점마저 그리워졌다. 베란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오션뷰는 한 달 지나니 시큰둥해졌다. 주변에는 상권 대신 귤밭이 형성돼 있다. 시골사람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더니, 우리 부부의 평균 취침시간은 저녁 9시~10시경이다. 깜깜해지면 나가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읍내에서 술 한 잔 할래도 막차가 9시 언저리라 새벽까지 만취하기 어려운, 본의 아니게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제주시나 서귀포시내에 살면 웬만한 편의시설이 다 있어 불편함이 많이 해소되지만, 육지에서 살다 온 이들에게는 생활권 자체가 좁을 수밖에 없다. 여행 왔을 때는 그렇게 재밌고 갈 데가 많더니, 이제는 남편이 쉬는 날 '어디 놀러 가고 싶냐'는 물음에 답할 곳이 없다. 섬 안에서 쳇바퀴를 돌고 있는 느낌이랄까. 제주는 바뀐 것 없이 그 자리에 있는데 간사한 사람 마음만 변한 셈이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오션뷰. 우리는 해 들어온다며 커튼을 치고 산다;;


비단 불편함 때문에 육지가 그리운 건 아니다. 전화하면 바로 만날 수 있었던 친구들, 가족들이 제일 아쉽다. 아무리 저가 항공이 많아졌고 서울까지 1시간밖에 안 걸린다지만, 비행기를 타고 육지에 가는 건 제주도 여행을 올 때만큼이나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친구들의 단체 채팅방에서 나누는 이야기 중에는 종종 나만 모르는 내용이 있고, 모임 사진에는 내가 없다. 한가한 날에는 커피와 담소를 나눌 친구가 고픈데, 이 사소한 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니.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는 쉽지 않다. 평소 인간관계도 그리 넓지 않았던 내 경우엔 그렇다. 나에 대해 설명하거나,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 않아도 편하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현재로서 내겐 남편뿐이다.(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서 우리 부부는 육지 사람들이 휴가에 제주도 여행을 오듯 늘 육지 여행을 꿈꾸곤 한다. 하지만 막상 화려한 도시에 입성해도 설레고 짜릿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는 편이다. '코가 맵다' '눈이 아프다' 온갖 촌티를 다 내면서 힘들어한다. 특히 남편은 사람과 사람이 겹치고 뭉개지는 지옥철을 경험하고 잠시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사나흘만에 제주도 땅을 밟으면 그제야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지역 맘카페에 유독 "떠난다"는 글이 자주 보인다. 나와 비슷한 시기인 3~4년 전 제주도에 대한 로망을 안고 왔다가 현실에 부딪혀, 혹은 그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 다시 육지로 나가는 이들이다. 곧 입도를 앞두고 제주살이를 묻는 이의 글에는 의외로 부정적인 댓글이 적지 않게 달린다. 중론은 '육지보다 불편하다'는 것.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언제든 산과 바다를 가까이 볼 수 있는 자연환경과 도시적인 생활 인프라가 이 섬 안에 공존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원래 이곳에서 나고 자랐거나 오래 산 사람들은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여행지가 아니라 집에 살기 때문이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매일 감탄하지 않고, 백화점이 없어서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산책하러 집 앞 오름에 가고 봄엔 지천의 고사리를 꺾으며 제주라서 가능한 삶을 누린다. 꿈의 아일랜드가 아니라 그저 사람 사는 곳, 거기서 그냥 일상을 사는 것. 이를 인정하거나 감내하고 제주에 터를 잡는다면 혼란이 덜 할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어려울 것 같다면 여행'만' 오는 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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