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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Jul 31. 2019

비혼주의자, 엄마가 되다

#14 마흔 즈음 찾아온 아기...제주에서의 3막 시작   

30대 중반까지도 내가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결혼에 뜻이 없었고,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2년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뭔가에 홀린 듯 결혼을 해버렸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관문으로 가는 건 일도 아니다. 가정을 꾸려서 자식 낳고 사는 게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어르신 같은 남편 덕분에 나는 독신이니, 딩크니 외쳤던 지난날을 비웃기라도 하듯 결혼 세 달만에 임신을 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과 함께 찾아와서 '노엘'이라고 태명을 지었던 아기는 17주 동안 내 뱃속에 머물렀다가 다시 하늘로 가버렸다. 이렇게 짧은 글로 다 적을 수 없는, 그 어떤 날카로운 흉기로 가슴을 후벼 판들 이보다 아플 수 없을 고통의 나날이었다. 다들 유산 한 번씩 한다고, 별일 아니니 기운 차리고 다시 아기 가지라던 주변의 위로가 가장 잔인했다. 태동까지 느꼈던 나와 내 뒤에서 울던 남편만 오롯이 아는 슬픔을 꽁꽁 싸매서 편지와 함께 태워 보냈다. 내가 언젠가 꼭 다시 찾아가서 너의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노엘을 보낸 후 나는 임신에 더 집착했다. 결혼하면 누구나 아기를 가지는 줄 알았고, 아기를 가지면 열 달 후에 모두 건강하게 낳는 줄 알았는데 임신과 출산은 산너머 산이었다. 유산의 이유를 은근히 노산으로 보는 양가 부모님들의 걱정을 어깨에 무겁게 짊어지고 속절없이 서른아홉이 될 판이었다. 철저한 계획에도 아기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빈 태몽만 꿔댔다.


안녕! 손 흔드는 건가?

그리고 다시 12월이 된 첫날. 아무리 노려봐도 실금 하나 떠오르지 않던 테스트기가 1년 만에 두 줄을 드러냈다. 이번엔 꼭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나름 쉬운 일이었던 알바도 관뒀다. 역시나 지난번 임신처럼 입덧은 혹독했다. '소주 3병쯤 들이키고 통통배에 누워있는 듯'한 울렁거림이 24시간 계속되는 괴로운 나날은 7주부터 17주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입덧 약을 먹으면 10번 할 구토를 5번 정도로 줄여줬기에 한 달치 15만 원이라는 약값도 달게 감수했다.


그 와중에 계속되던 검사, 검사, 검사. 초음파 기계를 배에 갖다 댈 때마다 '심장소리가 안 들리면 어쩌지?', 밀려오던 공포감과 안도감의 반복. 길에 지나가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건강하게 걷고 사고하며 살아가는 게 기적 같은 일이라는 걸 노엘이 알려준 덕분에 두 번째 임신의 모든 과정이 성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애지중지 품은 '복댕이'가 이제 1주 후면 세상 밖으로 나온다. 2cm도 안 되던 꼬물이에서 이젠 뱃가죽 위로 발바닥을 '팡!'하고 찍을 만큼 자란 요 생명이 우리 눈앞에 등장한다는 게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설렘의 이면에 두려움도 있다. 이제 아이까지 생겼으니 경력자로서의 취업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고, 적어도 3년은 육아에만 전념하며 살게 될 것이다. 주부를 폄하하는 게 아니라, 어쭙잖은 비혼주의자 시절에 전혀 그려보지 않았고 어쩌면 피하고 싶었던 '오직 엄마'로서의 삶이 현실이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대학 갈 즈음에 우리 부부는 환갑. 벌써부터 저녁이면 소파에 드러누우며 '아이고' 곡소리를 서로 경쟁하듯 해대는데, 20년은 더 소처럼 일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스멀스멀 몰려온다. 남편은 50대에 아이와 공놀이를 같이 못 해줄까 봐 지금부터 마라톤을 시작했다.


이제 진짜 한자리 숫자만 남았다! ㄷㄷㄷ

얼마 전, '맘카페'라 불리는 지역 주부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제주도 이주를 앞두고 퇴사를 걱정하는 글에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비록 이곳에 와 경단녀가 됐지만, 건강과 아이를 얻었어요." 실제로 나는 회사를 다니며 3년간 원인 모를 무월경에 시달렸다. 가장 기본적인 기능도 하지 않은 채 파업 중인 자궁이 생명을 품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진작에 버렸으나, 당시 비혼주의자에겐 크게 서글픈 질병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려 만출(심지어 4kg 육박 우량아 예정ㅠㅠ)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이 섬이 나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뱃속 아이와 집 앞 바닷가를 산책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우리 아이는 제주가 고향이구나,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와 달리 바다와 산이 너무나 익숙한 섬의 소년이 되겠구나. 시내와 좀 떨어져 있는 시골집에 산다면 조금 불편은 해도 '뛰지 말라'는 잔소리는 안 해도 되겠지, 회색 콘크리트보다는 푸른 잎을 더 많이 보겠지. 이런저런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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