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김살과 함께 살아가려면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고 계모와 새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다. 신나는 멜로디에 '얼마나 울었을까'라는 가사로 허무하게 끝나는 동요지만 생각해 보라. 어려서 부모님을 잃는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인 계모와 새언니들에게 구박까지 받았다면 정신상태가 온전할 리 없다. 게다가 친아빠는 이야기의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동화 속 신데렐라의 나이를 19-20세로 설정했을 때 이런 극한의 가정환경이 10년쯤 지속됐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들 가정환경을 기초 공사라고 한다. 기초 공사가 잘못되었는데 결혼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존경할만한 왕비라 칭송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인격을 가지게 되었을까?
갑자기 구김살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이유가 있다. 바로 이 구김살덕에 내 존재의 가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됐으니까. 주위 사람들을 지켜보다 보면 꼭 한 명씩은 범접할 수 없는 긍정의 기운을 쏟아내는 사람이 있다. 앞에 놓인 모든 게 걱정거리인 나와는 다르게 모든 게 즐길거리인 사람은 표정과 태도부터가 다르다. 은근한 부러움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닐 거라는 결론이 자주 났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낮추고 심연에 빠지는 삶을 살다 보니 '나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벼랑 끝까지 오게 되었다. 그 끝에서 뒤를 돌아보자, 구겨진 인간 하나가 맥없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
무엇 때문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누구나 하나쯤 있을 법한 가정사 때문일 수도 있고 자라면서 주위 환경에서 나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벼랑 끝에서 돌아본 나는 구겨져 있지만 드문드문 펼쳐져 있기도 하다. 보통의 구겨진 사람은 나쁜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질투, 수치심, 열등감, 분노, 불안, 자기혐오... 다른 사람의 조그만 행동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 그러니까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정신을 괴롭히는 답답하고 막막한 알껍질을 깨고 나오려면, 곱절은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는 꾸깃한 부분을 정성껏 다려놓는다. 그럼에도 흔적은 남겠지만 흔적은 다림질 후엔 극복을 증거 하는 영광의 상처로 남는다. 그 의지는 인간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세상을 향한 위대한 반항이다.
아직도 펼쳐야 할 주름이 산더미 같다. 예전엔 나의 구김살을 마주하게 될 때면 수치스러움에 한동안 우울감에 빠졌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서 타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며 말하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아주 가볍게 구김살을 인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야기 중에, 혹은 행동에서 비치는 구김살을 정면돌파하기로 했다. '이런 면이 있었구나, 앞으로는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부끄러움, 수치심 등 떠오르는 나쁜 감정을 그냥 흘려보낸다. 의지를 가지고 펼쳤기 때문에 구겨진 부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 알고 있는 실수는 다시 하지 않게 될 확률이 크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펼쳐가고 있다.
다시 신데렐라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신데렐라도 한 번쯤은 나와 같은 벼랑 끝에 발을 디뎠을 것이다. 갉아먹힌 자존감과 불안한 정신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었을지 예측할 수 없다. 아무리 식모살이에서 갑자기 왕비가 된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아니,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더더욱 구김살을 펴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끝맺음 속에서 신데렐라가 결국에는 구겨진 스스로라도, 흔적이 남은 자아라도 꼭,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삶에서 의미를 찾는 모든 구겨진 사람들이 꺼지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펼쳐나가기를, 그래서 그 질문의 벼랑 끝에서 마침내 구겨졌던 흔적만 남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