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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WT Nov 26. 2022

내년에는 트럭 몰고 올까 봐요

내가 직접 길러서 하는 김장 스토리 (상)

올해 배추 풍년 맞나요?


배추 농사는 예상했던 대로 망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배추 모종을 심었었는데, 그중에 속이 찬 배추는 20포기 정도 될까 말까 하더군요. 많은 배추들이 속이 차지 않아, 김장배추라고 부르기 민망했죠. 겉절이나 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배추가 좀 작은 것 같은데?'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친구 아버지께서 제게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저런 건 배추라고 부르는 거 아니여~"


작긴 해도 충실히 배추 모양을 하고 있던 배추를 배추가 아니라고 하시니, 잠시 머리가 띵했습니다. 곧바로 정신을 차렸죠. 배추 농사는 망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께 연락드려 부탁하나 했습니다.


"엄마... 배추 좀 더 사서 절여놔 주라."


전체적으로 모든 채소 가격이 오르긴 했지만, 올해 배추농사가 풍년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밭에 있는 배추들만 그 소식을 못 들었는지, 자기네 마음대로 크다 말았네요. 아마 지긋지긋한 달팽이 군단에게 하도 시달리다 보니, 충분히 크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 배추농사를 지을 때는 미리 달팽이 군단과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배추들을 위한 비료나 요소와 같은 영양제도 충분히 줘봐야겠습니다.


수확중인 배추


김장하면 빠질 수 없는 김장무와 총각무 역시 저희 밭 한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똑같이 키운 무인데도, 김장무는 생각보다 크기가 작았고, 총각무는 딱 적당한 크기로 아주 잘 자랐더군요.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건지, 농사라는 건 지을 때마다 아리송합니다. 예측해보건대 김장무는 좁은 공간에 비좁게 자라다 보니 크게 자라지 못한데 반해, 총각무는 추가로 받은 텃밭에 넓게 심어서 크게 잘 자라지 않았나 싶습니다.


수확중인 김장무


김장무야 부족하면 더 사서 보충하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을 가졌더니, 풍년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수확이라는 기쁨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쏙쏙 뽑히는 무를 뽑는 내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뚝뚝 부러지던 고구마와는 달리, 시원하게 쏙쏙 뽑히는 무는 제 손에 짜릿한 쾌감을 주더군요. 시원한 바람과 함께하는 밭일이 참으로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수확중인 알타리무



여기 인심이 이렇습니다


저희 집 김장을 영화 한 편에 비유하자면, 주연급 채소 배우는 단연 배추, 무, 알타리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연만큼 중요한 조연 채소 배우들도 물론 존재하죠. 쪽파와 갓입니다. 저희 친정 엄마께서 필요하다고 여러 번 제게 강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구 부모님께서 필요할 거라면서 제게 챙겨주셨거든요. 이 정도면 쪽파와 갓이 상당히 큰 역할인걸 부인하기 어렵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겉절이 수준의 소량 김치만 담가본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제 텃밭에 미처 심지 못한 쪽파와 갓은 천사 같은 친구 부모님께서 물 한 바가지 퍼주듯 아무렇지 않게 한가득 나눠주셨습니다. 어찌나 감사한지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말씀드리지 않아도 필요한 부재료까지 넉넉히 담아주시는 이곳 인심. 정말 너무 멋지지 않나요? 이런 경험이 계속 쌓이다 보니, 도시보다 흙내음 풀풀 나는 인심 넘치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싶은 욕심이 나네요.


친구 부모님께서 나눠주신 쪽파와 갓



얘들아 서울 가자


흙에서 모조리 뽑아낸 후, 무들을 서울 친정으로 데리고 갈 준비를 시켰습니다. 배추와 함께 친정으로 가지고 가서 친정식구들과 함께 가족행사처럼 김장을 하려고요. 김장무는 이틀 정도를 차에 보관해야 하는 피치 못할 상황 때문에, 시래기가 되는 무청을 조금씩 남겨두고 잘랐습니다. 마치 한동안 안 자른 머리를 스포츠머리로 잘라주듯, 무들을 깔끔하게 이발해주었지요. 반면에 무청까지 모두 먹는 총각무는 흙만 털어내었고요.


배추는 친구 어머니께서 손수 절여주신 덕분에 한시름 덜 수 있었습니다. 친구 어머니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일반 차 트렁크에 싫기에는 너무 많은 배추를 가지고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할뻔했죠. 밭 근처에 살고 계시는 친구 부모님 댁으로 소형 SUV에 두 번에 걸쳐 배추를 옮겨놓았습니다. 어떻게 옮길지 자세히 고민도 안 해보고 준비한 김장이라 구멍 투성이지만, 주변분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하나하나 메꿔갑니다.


김장재료로 꽉차가는 트렁크


배추들이 잘 절여지려면 거의 하루 정도는 걸린다고 하는데요. 얼마 뒤 찾아간 친구 부모님 댁에서, 놀랄 정도로 부피가 확 줄은 배추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못 먹는 부분은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소금에 푹 절여진 배추는 다행히 부피가 많이 줄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피가 너무 줄어, 내 배추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아쉬운 마음도 조금 들더군요. 절여진 배추와 김장재료를 차곡차곡 차 트렁크에 넣어보니, 차 한가득 김장재료 냄새와 흙먼지로 가득 찼습니다. 차는 비록 세차가 필요한 꿉꿉한 신세가 되었지만, 태어나서 가장 뿌듯한 김장을 할 생각을 하니 어깨춤이 절로 납니다.


친구 부모님께서 직접 절여주신 김장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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