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이의 변화에 화가 날까?
아이의 사춘기가 시작될랑 말랑할 때, 부모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나와 주변에 한정하지 않고 더 많은 부모들의 감정을 듣고 싶었다. 내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글을 올렸고 부모님들이 화내면서 정성스럽게 달아준 228개의 댓글을 옮겨 분류를 해보았다. 그리고 1000여 명 정도 들어가 있는 부모님들의 오픈카톡방 두 곳에 들어가서, 지난 3주간 아이의 사춘기 행동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감정을 토해내는지 관찰해 보았다.
오픈카톡방은 거의 밤낮없이 글이 올라왔고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방에 들어가 잠드는 그 순간까지 부모를 화나게 만들고 고민하게 하는 아이들의 말과 행동이 실시간으로 계속 올라왔다.
솔직히, <아- 역시 느낌이 아니라 진짜였어>라는 생각과 <우리 아이만 그런 것은 아니군>이라는 안도와 <생각보다 진짜 사춘기가 빠르고 강한데?>라는 공포가 함께 밀려왔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느낌을 뒤로하고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이런 공통점이 있었다.
눈빛과 말투에서 아이의 첫 사춘기 진입을 직감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평소처럼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묘하게 싸-한 느낌을 주는 아이의 눈빛. 보다 강하게 엄마아빠를 쳐다본다던가 할 말이 있는데 하지 않겠다는 그런 눈빛.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아이의 이런 첫 눈빛을 마주했을 때 아이가 사춘기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잘못본거겠지?' '에이....?'라고 판단을 미루어두는 경우가 더 많은 듯했다. 하지만 아이의 말투에 변화가 생기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이가 '하아...' '아니 근데...'라고 말대꾸를 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명백한 사춘기의 첫 신호탄이다.
이렇게 눈빛과 말투가 조금 달라지면서 아이들은 무시파와 반항파로 나누어 행동하기 시작한다. (두 개 다 속하는 아이도 물론 있는 듯하다) 무시하는 부모가 건네는 조언이나 제안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행동을 보인다. 건성건성 "응..." "네에.." 하거나 부모가 한참 이야기 하고 있는데 눈빛이 허공 어딘가에 있거나, 못 들은 척하며 중얼중얼 거린다. 좀 더 짓궂게는 "눼에~~~~~~~~~" 라고 장난을 치며 부모를 (특히 엄마를) 무시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렇게 아이가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부모는 그동안 자신이 해온 부모역할에 대한 현타를 느끼게 된다. 내가 고작 이 꼴을 당하려고 그간 아이를 물고 빨며 키웠는가, 벌써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얼마나 나를 무시할까 라는 허무함이 밀려온다.
조금 더 부모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저항을 강하게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반항말투가 바로 "왜"이다. 그동안 어르고 달래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던 아이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런 왜 해야 하는데?"라고 반항 섞인 말투로 되물으면 정말 말문이 막히기 시작한다. 갑자기 왜 이유가 필요하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에 왜 이유를 붙이지? 부모는 아이의 질문이 너무 황당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반항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 기름을 붓는 아이의 말이 있다. 바로 "내가 알아서 한다고"이다. 뭘 알아서 한다는 말인가? 아니 알아서 한다고 하고 한 적은 있냐!!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그저 '듣기 싫으니 그만해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니 부모로서는 정말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이가 가진 성격적 특성에 따라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정기복이 심하게 나타나는 아이들도 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감정이 내려앉다가 작은 일에 뛸 듯이 기뻐하거나, 조그마한 일에도 울거나 삐지는 행동을 한다. 특히 감각적인 민감함을 가진 아이들은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짜증을 부리거나, 징징거리며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수 있다. 어느 정도 받아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문제는 부모의 신체적/ 심리적 체력이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어떻게든 받아줬지만 아이가 최소 10살 정도 되었다는 것은 부모의 나이도 그 사이 많아졌다는 의미.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받아줄 체력이 없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아이들은 생활습관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학습뿐 아니라 씻고 먹고 잠을 자는 기본 생활습관이 흔들리니 부모와의 갈등도 계속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특히 부모를 매우 화나게 만드는 주요 요인임과 동시에 주의해야 할 행동 중 하나가 바로 <거짓말>이다. 하지 않았는데 했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몰래 하고 숨기기 시작한다. 이런 행동이 나타나면 부모는 아이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부모와 아이는 신뢰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를 아이와 이별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에 이제 막 진입한 부모의 마음은 참 복잡하다. 단순히 '화가 나고 밉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다. 어쩐지 슬프기도 하고, 잘해보면 되지 않을까 아쉽기도 하고, 이제 빨리 커버려라! 에라 나도 모르겠다는 체념의 감정도 생긴다. 내가 만난 다른 부모님들도 이런 솔직한 마음을 비슷하게 호소하곤 했다. 우리의 육아에는 왜 위기가 왔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화가 나고 또 마음이 복잡한 걸까?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별 직전의 상태이다. 예전에 다정하고 사랑스러웠던 상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진다. 나와 보내는 시간 말고 자기도 좀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너와의 관계가 답답하다고 온 눈빛과 말투로 나에게 말한다. 나와 보내던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건성건성, 때로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보인다. 이럴 때 우리는 이미 이별을 예감하고 있고, 그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소중했던 대상을 상실하고 슬픔을 느끼는 단계를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사춘기에 진입한 아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이런 단계에 따라 변화하고 깊어진다. (*이 모델에 의하면 제시된 각 단계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부정: 어? 아냐, 아직 그럴 리가 없어
아이의 눈빛과 말투에 반항이 느껴질 때 우리는 이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잘못 느낀 걸 꺼야, 아냐 벌써 그럴 리가 없어.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한다. "너희 아이도 그래?" 아직 시작도 안 한 거래, 우리 아이도 그래 -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도하기도 하고 오히려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생각해 본다. 뭔가 방법이 있겠지.. 부모의 마음에는 약간의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한다.
타협: 이렇게 해볼까? 아니면 이건 어때?
이쯤 되면 아이의 말과 행동은 빈도가 잦아진다. 더 이상 아이의 변화를 부정할 수 없다고 느끼면 부모는 노력을 해보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나을까? 그냥 눈 딱 감고 조금만 더 공감해 줄까? 아이와 단 둘이 시간을 좀 보내볼까? 엄마아빠도 노력하고 있잖아 설득하기 등 온갖 시도를 해본다. 하지만 그러다 되려 마음이 펑- 하고 터지고 만다. 내가 좀 더 노력하면 아이도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아이는 점점 더 꼴 보기 싫은 행동을 하는 걸까? 이젠 나도 한계가 오는 것 같다. 부모의 마음은 희망에서 실망감으로 바뀐다.
분노: 감히 나에게?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아이는 부모의 속을 더욱 본격적으로 긁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 부모의 마음에는 담아줄 여유가 없다. 아이를 보고만 있어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직 쪼끄만 게 벌써 저렇게 행동하다니, 저 말투 진짜 뭐야? 아이방에만 바람이 세게 부는 것도 아닌데 저 방문 닫으며 쿵쾅거리는 행동은 뭐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모는 아이와의 본격적인 결투를 시작한다. 너 용돈 없어. 그럴 거면 너 나가서 살아. 니 맘대로 해! 아이에게 퍼부어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는다. 내가 지 친군가? 유치하게 싸우는 스스로의 모습에 실망하고, 분노와 죄책감은 부모의 마음을 휘젓기 시작한다.
절망: 이제 아이와 나의 관계는 끝났어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라고 부모는 생각하게 된다. 혹시 내가 아이가 어릴 때 육아를 잘못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자책감과 '이제 아이와의 관계는 끝인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사춘기가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다시 아이와 좋은 관계로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절망적인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아이와의 좋은 시간을 상실한 부모가 느끼는 최고조의 감정이 바로 절망이 아닐까 싶다.
수용: 이제 새로운 아이를 받아들여야 해
그리고 비로소, 부모는 수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아, 아이는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구나. 이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말로 방법이 없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예전에 방긋방긋 웃으며 엄마아~ 압빠아~ 하며 달려오던 아이의 영상을 보면서 그리워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아이는 잠시 다른 나라에 가 있고, 새로운 아이가 우리 집에 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 아이가 많이 자랐구나. 이전에 아이와 관계를 맺었던 방식이 효과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연습하자' 이 생각이 부모의 마음에 자리 잡아야 한다. 수용이 없다면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다음 발달단계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와의 이별, 한 번에 수용될 리가 없습니다
아이에 대한 실망과 분노, 죄책감 없이 바로 수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모든 단계를 건너뛰고 수용으로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부정과 타협, 분노와 절망의 단계를 지나야 비로소 수용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지지고 볶고 대치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불편해서 우울해하는 부모님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런 상황은 부모로서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부모로 가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별과 상실 앞에 장사 없다. 겪을 수밖에 없는 감정인 것이다
가능한 수용의 단계로 빠르게 넘어가, 새로운 방법을 배웁시다
하지만 수용의 단계에 반드시 도달하는 것은 중요하다. 수용까지 가지 못하고 부정이나 절망 그 어딘가에서 멈춰버리면 우리는 아이와의 관계를 정말 회복하기 어려워진다. 바로 수용으로 갈 수는 없지만 반드시 수용에 도착해야 하고 가능한 한 빨리 마음이 정리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받아들인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방법을 배우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수용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건강한 수용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까? 사춘기가 올랑말랑- 이 제목으로 내가 부모님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