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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Jul 26. 2021

"면접관님 구직자에게 사과하세요"

마흔 번 넘게 불합격해도 자신감을 쌓는 방법

구직스트레스가 심해지자 진상짓을 해댔다. 정점은 복싱장에서 벌어졌다. 복싱을 배우면서 발목과 무릎에 무리가 갔다. 어느 날 아예 걷질 못해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수업일수가 딱 14일이 남았던 때, 강습료의 반액이라도 환불 받고자 전화했다. 복싱장은 규정상 해줄 수 없다고 했고 나는 왜 해줄 수 없냐고 고집과 짜증을 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성껏 가르쳐준 관장님의 수화기 너머 대답은 짧았지만 안절부절한 게 느껴졌다. 그래도 진상짓을 계속했다. 퉁명스럽게 전화를 끓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면접자도 회사를 평가합니다'라는 말은 요즘 채용시장에서 자주 쓰는 말이지만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인 말이다. 전형에서 탈락하는 건 그냥 그렇다. 정말이다. '결국 나랑 맞는 회사가 나타난다'는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직 과정 내내 철저히 회사가 원하는 서류와 과제를 내고 스케줄을 잡는 수동적인 상태가 힘들다. 열정과 진심을 담아 지원한 맘을 비웃기라도 한 듯 드문드문 불편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면접 30분 전 일정이 생겼다며 인터뷰 일정을 옮긴 일, 압박면접을 빙자하면서 구직자의 능력을 깍아내리는 일, 전 직원 욕하기 등은 자괴감을 들게 한다. 하지만 점점 통장잔고가 0을 향해 갈 때 이런 것들도 그려려니 하는 순간이 온다. 어느 소속도 아닌 백수인데도 구직은 을 마인드를 탑재하게 했다.


눈물을 한가득 안은 마음은 최악의 채용을 겪고 우울에 빠져버렸다. 나름 업계에 인지도 있는 회사 대표가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이전에 이벤트에 참여한  번호를 추적해 카카오톡으로 구직 제안을 했다. 엄연히 개인정보법 위반이다. 그리고 당일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 이유를  자기소개와 관련 이력서를 달라고 했다. 자격요건이나 하게  , 채용과정에 관한 안내는 전혀 없었다. 면접은 공동대표 2명이  것이라고 했는데, 당일 다른 대표는 바빠 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불참한 대표를 보기 위해 다시 방문했다.  면접에선 직전 회사 연봉, 지금 면접보고 있는 회사 등을 물었다. 다음날 전화로 과제가 있다며 깜짝 소식을 전했다. 이틀 내로 과제를  달라고 했다. 최종면접을 보고 열흘이 지나서야 카톡으로 공채로 뽑기로 했다고 전했다.  카톡을 받은 . 결과를 떠나 진심으로 임한 구직자에게 함부로 하는게 화가 났다. 무엇보다 이러한 과정 내내 아무런 말도  하고 끌려다닌 내가 제일 싫었다.


6월 말에 본 그 면접 이후로 한동안 구직 매너리즘에 빠졌다. 그러면서 비를 맡고 다녔다. 옷도 대충 레깅스 입고 다녔다. 회사에 지원하는 건 물론 모든 일이 헛되이 느껴졌다. 채용과정을 곱씹으며 '내가 별로라 부당한 대접을 받았나' 생각했다. 그러면서 생긴 피해의식의 불똥은 주변 사람에게 튀었다. 비가 많이 내리던 장마기간, 운동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걷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6월부터 우산을 챙길 정신 같은 건 없었고 그날도 비를 맞으며 추적추적 걸었다. 그런데 뒤쪽에서 오던 할아버지가 어물적 거렸다. 괜히 하체 실루엣이 다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어서 마음은 불편했고, 곧 내 앞을 가로막았는데 걸음도 느려서 길을 막았다. 짜증이 났다. 할아버지를 노려봤는데, 우산을 씌워주면서 "이리 귀하게 태어났는데 왜 비를 맞아"라면서 "버스정류장 까지 가는 거면 데려다줄게"라고 하셨다.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목이 맥혀 아무 말 못 하는 나와 할아버지 사이 빗소리가 들렸다. 6~7월 내내 비가 내렸는데 참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우연히 마주친 할아버지처럼, 부모와 주변 사람이 아껴주며 소중하게 자랐는데, 왜 지금은 주변의 따뜻한 손짓에 생채기를 내고, 혼자 피해의식에 빠져 나를 망치고 있을까 생각했다.


우산을 씌어준 할아버지의 말과 마음을 곱씹으며, 2주 전 면접을 본 대표에게 장문의 카톡을 썼다. 며칠 전 채용과정에서 겪은 일들이 왜 불합리하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썼다. 쓰는 내내 호들갑이 아닐까 생각했다. 앞으로 업계 사람인지라 만날 수도 있었고 인지도도 높았기 때문에 두렵기도 했다. 대표 입장도 이해는 됐다. 급하게 사람을 구해야 해 주먹구구식으로 채용을 하고, 사람들이 너무 자주 퇴사하니 부침이 심해서 우왕좌왕했다고 짐작됐다. 하지만 그 피해를 전형에 진심으로 임한 내가 받아야 할 이유는 없고, 이젠 일상을 꿍하게 지내 주변 사람들에게 진상을 부리는 일도 그만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결과를 떠나 과정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당사자에게 이의 제기를 해 나를 지키고 싶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대표에게 카톡을 보내고 복싱장에 전화했다. 어제 죄송했다며 짧은 기간이지만 잘 가르쳐줬는데 기분 나쁘게 해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그리고 요즘 취직이 안돼서 별거 아닌 거에도 생체기를 내고 남 탓한다고 말씀드렸다. 항상 단답형으로 짧게 말하던 관장님은 처음으로 길게 말씀하셨다. 정말 당황하고 속상했다고 하지만 말해줘서 이해한다고 꼭 다시 취직이 되면 배우러 오라고. 전화를 끓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정말 좋은 곳에 취직하고 싶어 다시 자소서를 썼다. 여러 회사의 면접을 보는 요즘. 나는 콧대 높은 회사들, 능력이 부족한 나를 볼때마다 쉬이 주눅 든다. 하지만 대표에게 문자를 보내고 사과를 받은 일을 통해 어떤 일이든 실패하더라도 과정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목소리를 내서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구직이라면 이 시간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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