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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Aug 17. 2021

처음 이직한 직장인이 출근 가방에 꼭 챙기는 마음

길었지만 꼭 필요했던 백수 청춘의 회고록

혼자서도 잘한다는 말은 뭘까. 역설적이게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잘 해낸다는 뜻이다. 2020년 작년 여름, 아빠가 갑자기 이유 없이 쓰러져 3일을 몸져누웠다. 다들 두려웠겠다고 위로했겠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아빠가 없으면 내가 동생과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섰다. 그 후에도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부모에게 큰돈을 빌려줬다. 항상 큰 힘이 되고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부모가 약해지고 나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돈을 많이 벌고 혼자서 살아남는 강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젠 나뿐만 아니라 가족을 책임질 수도 있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돌연 퇴사해 백수를 자처했다. 남자 친구도 없다. 어느 조직에 누구도 아니고, 누구의 여자 친구도 아닌 나는, 그저 나하나만 믿고 혼자서도 잘 해쳐나가고 성장할 줄 알았다.


혼자 뭘 잘하는 이들을 숭상했다. 그래서 나도 '혼자서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다. 대학 때는 자신의 일상을 내팽겨 치고 남자 친구나 우정 놀음에 휘둘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콧웃음을 쳤다.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 한번 못해보고 제대로 된 연애한 적 없지만 그래도 나를 지켰다는 멍청한 자신감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혼자 맡아 가끔 신경질적이었는데 내면엔 혼자서 다 해낸다는 우월감이 있었다. 운동을 하더라도 1:1 레슨만 받곤 했는데 남에게 부족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성격 탓이 한몫했다. 11년째 해오는 발레지만 사람들 앞에서 남 앞에서 엉거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선생님이나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될 텐데 그것을 학습하지 못했다. 질문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권력으로 생각했다.


백수 초반에는 당당했다. 홀로 노력해 보란 듯이 가고픈 회사의 출입증을 금세 될 거라고 장담했다. 언제나 혼자서 잘했다는 착각이 있었으니깐. 근데 생각보다 인생은 내 맘대로 풀리지 않았다. 열심히 쓴 자소서는 서류부터 떨어지기도 했고, 최종면접에서 여러 번 떨어지고 동시에 지금 내고 있는 직무가 진짜 적성에 맞는지 진로를 고민했다. 나이 서른 하나에 말이다. 예민해졌다. 친구를 만나면 별거 아닌 거에 마음이 토라지고 일상을 말하지 않았다. 부모와 이야기하기 두려워 도서관에 새벽부터 가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완벽한 혼자가 됐다. 삼십 대 초반의 좌충우돌과 실패는 당연한 건데 부족함을 내비치고 도움 구하는 걸 연습하지 못했기에 혼자 끙끙 앓고 이직에 실패를 반복했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고 나서야 알았다. 지금까지 홀로 무언갈 한 적이 없다는 걸. 지금의 나는 수많은 주변인들 덕에 있고, 내가 이뤄냈다는 몇 가지의 결과물도 다 주변의 도움과 선심에 됐다는 걸 말이다.


백수기간, 생각보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도와주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등산을 가자던 친구, 괜찮은 채용공고를 보며 딱 맞는 거 같다며 앞장서던 선배, 기꺼이 추천서를 써주고 추천을 해주던 업계 선배나 파트너사 동료, 취향에 꼭 맞는 책들을 빌려준 후배들. 취직을 닦달은커녕 딸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맛있는 거 먹으라고 말하던 부모. 홀로 벌벌 떨면서 공격과 방어태세를 갖춘 마음에 빗장을 푼 건  그 따스한 마음들이다. 그렇게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등산로를 함께 가고, 다시 이력서를 고치며 구직을 했다. 나를 위하는 마음을 마주할 때마다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래서 주변에 적극적으로 나의 실패를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조언을 구하고 다녔다. 그때부터 취직 문제는 쉽고 빠르게 풀렸다. 백수를 겪지 않았더라면, 회사에서 혼자 프로젝트를 하면서 살았더라면 그 따뜻한 마음을 영영 모른 체 오만하게 살았을 거다.


푸르른 가을의 첫날, 입추는 백수 라이프의 마지막 날이었다. 높고 맑은 하늘을 보며 한 계절이 끝났음을 느꼈다. 그리고 나도 변했음을 느꼈다. 이젠 뭐든 혼자 한 거란 바보 같은 생각은 끝이다. 첫 출근 가방에 뭐를 챙겨야 할지, 너무 오랜만에 싸는 가방이라 갈팡질팡 했지만 정확히 두 가지는 담았다. 부족함을 드러내는걸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용기 이 두 가지의 다짐은 확실하게 가방에 넣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더 성장한 동료, 더 나은 직업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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