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걸 얻었을 때부터가 시작

스타트업을 다니면서 단단해진 일의 신념

by 배추도사

노동 역사 이래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부러움을 사는 인간 유형은? 아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인간이 아닐까. 나도 그런 사람이 정말 부러웠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직한 회사는 커리어에 한 획이었다. 그렇게 세일즈가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IT 세일즈를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들떴다. 취직해서도 좀처럼 일 못해서 굴욕과 무시를 당해도 그냥 세일즈를 하니깐 기분이 좋았다.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깐. 그런데 스타트업에서는 빠르게 성과를 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세일즈를 처음 해봤기에 잘 못했고 그래서 마케팅으로 부서 변경을 제안받았다.


마케팅이 정말 하기 싫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뾰로통했다. 세일즈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재주는 마케팅이 부리고 돈은 세일즈가 버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돈을 직접 버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상했다. 사수가 될 마케팅 팀장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투정을 잠자코 듣다가도 B2B 소프트웨어 마케팅은 제품의 가치를 파는 일을 하는 거고 넌 분명 잘할 거 같다고, 함께 일하고 싶으니 회사에 적응할 수 있게 팀장과 팀이 도와줄게라고 말했다. 팀장은 그때 나의 어떤 가치를 알아봤을까.


팀 사람의 응원을 받으며 마케팅을 다시 시작했지만 매일 넘어졌다. 콘텐츠를 매일 써야 하는데 회사와 직무에도 애정이 식었으니 될 리가 없었다. 월급값은 하겠다고 주입식으로 회사 제품 설명서와 대표가 쓴 자료를 몇 번을 읽었지만, 머리로는 알겠는데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 업무에 그게 다 드러났다. 회사의 생각을 말과 글로 담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CEO와 자주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좀 마음을 다잡으면 어김없이 CEO와 100m 멀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예전엔 마케팅 잘한다고 이야기 들었던 거 같은데 이젠 그마저도 아닌 거 같아서 설명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회사에서 자주 대놓고 울었다. 왜 일하나 똑바로 못해서 수습이 연장되고, 능력을 의심받는지, 아예 직장인 체질이 맞긴 한 건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일에 지쳤을 때 '고객 인터뷰'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내 감정과 회사를 한 발짝 떨어져 마주하게 됐다. 제품 사용자들의 초반 후기를 듣고, 왜 제품을 선택했는지 콘텐츠로 만들었다. 일을 위해 꾸역꾸역 인터뷰에 들어간 나와 달리 고객은 들떠 있었다. A4용지 3장을 빼곡히 제품이 얼마나 비즈니스에 수익과 시간을 벌어줬는지 정량적이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적어왔다. 그날 인터뷰 내내 고객과 나 사이 괴리감이 커, 마치 TV를 보는 거 같았다. 네댓 번 인터뷰를 거듭하며 사람이 바뀌어도 내용은 한결같았다. 두 달간 여러 번의 인터뷰가 끝나면 빈 회의실에 혼자 멍하니 앉아 개인적인 감정에서 한 발짝 떨어져 회사를 생각했다.


'우리는 달에 간다'라는 말은 일론 머스크만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의 작은 스타트업들이 일상을 요약하는 말이다. 달에만 가지 않았을 뿐, 세상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없던 길을 가고 매일 실패한다. 스타트업계를 선택한 큰 이유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데 일조하면서 함께 성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입사를 해서 일까. 회사에서 흔하게 듣는 말이 '이걸 할 줄은 몰랐다'는 말이지만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대표든 신입이든 경력, 직책 안 따지고 뭐든 한다. 모두가 그런 곳에서 나는 막상 원하는 걸 얻고 나니깐 감정에 앞서 콧방귀를 뀌고 토라지고, 찡찡거렸다.


6개월간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일에 대한 신념이다. 일은 하고 싶고 아니고를 따지는 기호가 아닌 가치를 찾아서 하는 것이다. 이 신념이 생기고 나선 회사에서 비판을 받더라도 굴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왜 안됐는지, 왜 그런 피드백인지 생각한다. 딱 1년 전엔 세일즈팀은 일을 떠넘긴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세일즈 동료가 현장에서 필요한 자료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미팅 갈 때 건강하고 재밌는 근거자료를 양손 가득 가져가게 하는 것. 그래서 요즘은 인터뷰 질문을 좀 더 잘 뽑고, 글을 명확하게 잘 쓰려고 한다. 고집부리기보다는 가치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그 덕분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회사생활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빈 공간에 대하여